Page 122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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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참살당한 사람이 2명, 합하여 모두 24명이 희생되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42)



                 천도교 신자 : 안정옥, 안종엽, 안봉순, 홍순진, 안종환, 언종환의 아들, 안유순, 안무순, 김
               정헌, 안명순, 안관순, 안종린, 김덕용, 안경순, 안상용.



                 감리교 신자 및 기타 : 안종락, 안종후, 안진순, 안필순, 조경칠, 강태성, 강태성의 부인 김

               은희, 홍원식, 홍원식의 부인 김씨.


               6. 팔탄면(八灘面)



                 1919년 4월 5일 발안장 시위에 팔탄면 고주리 주민들도 천도교 고주리 전교사 김흥렬과 김
               성렬의 주도 아래 마을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발안으로 가 낮 12시를 기해 발

               안주재소 앞에서 투석전을 벌였다. 김성렬, 김세열, 김주남, 김흥복 등이 체포되어 심한 고문
               을 받고 돌아왔다. 1919년 4월 9일 새벽 고주리에 순사보 조희창을 선도로 수비대가 들이닥쳐
               마을을 포위하고 가가호호 수색을 하여 미처 피하지 못한 안경환, 현병기, 김시열, 김창렬, 김

               경렬, 김동진, 김교신, 송준용, 박경의, 김성렬, 김흥복, 김주남, 김세열 등이 발안주재소로 끌
               려갔다. 김흥렬괴 김주업은 결혼식 준비 때문에 남양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 끌려간 주민들은
                                                                     43)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문을 받고 산송장이 되어 냇가에 버려졌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제암리 주민을 집단 학살하고 마을을 모두 불태운 수비대 중 6명이 조
               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앞세우고 제암리에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고주리로 올라왔다. 고

               주리 주민의 대부분은 제암리 참변을 목격하고 대부분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김홍렬 가
               족만은 “그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 없는 사람들은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하는 생

               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에 있었다. 수비대를 이끌고 들이닥친 조희창이 수
               비대에게 김흥렬을 비롯한 김성렬,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가족 6명을 끌어내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가서 칼로 목을 쳐서 죽이고는 그것도 부족하여 나뒹구는 몸체를 난도질

               하여 여섯 토막을 냈다. 수비대는 6명의 시신을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 쌓은 다음 불을
               질렀다. 시체조차 구별할 수 없이 잿더미로 만든 것이다. 김세열의 부인 한씨는 이 참혹한 현





               42)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13쪽.
               43)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314쪽.



               120  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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