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4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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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소리를 더욱 높였다. 유진홍(兪鎭弘), 안낙순(安樂淳)등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에서 출발하여 성호면사무소와 오산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다. 현지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오오키는 유진홍 등 3명
               의 주동자를 체포한다. 이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높이자,

               이에 기가 꺾인 오오키는 체포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석방에도 불구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

               규환, 김용준, 유진홍 등이 다시 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유진열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니 죽여라”하며 투석전을 하였다. 이후 오산우편소를 파괴하고, 일
               본인 거주지로 몰려가 파괴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자 일본 경찰과 보
               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지역의 3·1독립만세운
               동은 식민지배기구였던 면사무소, 경찰서 앞에서의 실력행사를 보여준 것으로서 당연한 우리

               의 주권을 공표한 것이다. 오산지역에서 야금야금 거주지를 확장하는 일본인들의 지배력을 부
               인한다는 실력행사였다.        54)
                                                     55)
                 이 시위로 관공서와 민가 13채가 파괴되고,  일본병이 출동하였을 땐 2명이 붙잡혀갔고, 일
               본병의 발포로 약간 명의 부상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오후 4시경에 우시장에서 시작된 이 만
               세 운동은 오후 5시가 되며 해가 서산으로 기울 즈음 오산리의 유진홍, 안낙순이 태극기를 휘

               두르며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만세를 높이 부르자 군중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낼 수 있었
               던 것이다.
                 오오키가 시위대를 뒤따라가며 거리 변두리에서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유진홍이 격렬하

               게 저항했던 것이다. 오오키가 유진홍과 기수 안낙순을 비롯한 6~7명을 주재소로 끌고 간 것
               이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아간 자를 석방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
                 이렇게 시위 군중들은 완강하게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경찰은

                 “안치자를 풀어주는 대신 해산하라!”
                 “조선독립만세”





               54) 남경식, 『오산역사문화』, 우리동네사람들, 2013. 130~131쪽.
               5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1968. 369쪽.



               122  강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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