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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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선언은 유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행하였다기보다는 국내외의 민족지도자들과의 깊은 연락 속
에서 국내의 큰 독립운동을 위한 전초전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2·8독립
선언 후 유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국내로 들어와 자신의 연고지 등을 찾아 3·1독립만세운
동 사전 교섭과 계획을 하였기 때문이다.
3·1독립만세운동의 국내 계획은 1918년 말부터 행하여졌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포함한 48인이 준비단계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의 지도급 인사들
및 학생단 대표였다.
종교계와 학생층이 민족적 거사 추진의 주도 세력이 되었는데 이는 유교사회 지도자의 후퇴
로 신지식인 층이 한국근대사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음을 말하여준다.
이들 지도층이 처음에는 서로 연계 없이 각기 민족적 거사를 계획 추진하고 있다가 그 뜻이
하나임을 서로 알게 되어 곧 통합된 민족 지도력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 볼 때 3·1운동은 2천
만 민족의 마음이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 한만족의 자주독립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
적 조류요 소명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거족적 독립운동의 합동이 가능하게 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선정해야 하였
다. 결국 천도교계에서는 15명, 기독교에서 16명, 불교계에서 2명이 서명하여 33인이 민족대
표가 되었다. 이중 29명이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 시위에는 일제의 탄압이 따를 것이지만, 그렇다고 거족적 운동을 한 번의 시위로
끝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3·1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맡아서 추진할 48인 중 33인만
이 민족대표가 된 것은 그 나머지 분들이 독립운동을 2차, 3차로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였다. 9)
3. 3·1독립만세운동의 확산
서울에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3월 1일
당일에는 전국 주요도시에서 일제히 봉기하였으며 그 후에는 철도 연선을 따라 대도시에서 중
소도시로, 그리고 읍, 면, 리와 산간벽지로 파급되었다. 그리고 각지의 운동은 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되었으며 지방의 대부분은 장날을 기하여 발생하여 5일~10일 간격으로
되풀이 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참가 계층을 보면 3·1운동의 주체는 예외는 있으나 주로 천도교와 기독교가 주체가 되
9)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1995. 282~286쪽.
108 강경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