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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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평평한 곳에 암문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1805년 건릉의 외안산으로서 능역
(陵域)에 포함된 독산성의 서북쪽에 잡인(雜人)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독산성에 암문을 신설
하게 되었다.
1807년에는 중군 이문철이 3개월 치 삭료(朔料)를 출연하여 무너진 문루와 공해를 수리하였
고, 1812년 수원유수 박륜수(朴崙壽)는 총리영 마보군(馬步軍)의 봄철 군사훈련과 독산성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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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城操) 함께 거행하겠다고 치계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독산성의 수성(守成)을 위한 군사훈
련이 정례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산성은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朴綺壽 1774~1845)에 의해 또 한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진
다. 박기수가 편찬한 『화성지』에는 「독성중수기(禿城重修記)」가 실려 있는데, 이에 의하면 정조
때 수축한 이후 수리하지 않아 여첩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3개월간 중수하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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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였다. 『화성지』에는 1831년 당시 독산성 내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정리하면 표와 같다.
건 물 명 규 모 건 립 시 기 位 置
將臺(洗馬臺) 3칸 1787년 건립 城上
1787년 개건 城內之南, 思悼世子(1760 經宿),
運籌堂 9칸
1790년 중수 正祖(1790 臨御)
3칸 1790년 개건
三門 運籌堂之前
行廊 11칸 편액‘禿城衙門’
1753년 중수
運籌堂之南
鎭南樓 6칸 1790년 개건
1831년 편액
1831년 중수
餓前廳 9칸 運籌堂之東
將校廳 9칸 衙前廳之西
官廳 4.5칸 1805년 건립 將校廳之西
大廳 3칸
四倉 官廳之西
倉庫 60칸
五倉 四倉之東
67) 上同.
68) 『日省錄』純祖 12年 1月 3日 丁丑.
69) 『華城誌』卷2, 山城.
58 김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