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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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독산성의 승첩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과 김천일 의병부대의 긴밀한 연계로 이룩한 승첩이
74)
기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현재의 오산지역이 속해 있던 수원지방 의병들은 자신의 향촌과 나
라를 방위하고자 하는 지방민의 애국정신으로 7년 전쟁 전 기간을 통해 전화(戰禍)를 덜 입게
하고, 농촌 사회의 전면적인 황폐화를 막을 수 있었다. 75)
또한 독산성 전투는 삼국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부활시키는 계기가
76)
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병략가였던 도제찰사 서애 유성룡의 관방론을 갖게 하는 중요한 배경
77)
이 되어 조선의 군사전략과 전술에서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
도성 주변의 산성시스템을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독산성은 한양 방어의
78)
전략적 모델이 되어 여주 파사성, 금천 금지산성, 강화도 정족산성 등이 중수되었다. 아래의
기사들은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이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22일 임인 79)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원주(原州)·지평(砥平)·양근(楊根)에는 수어(守禦)할 만한
곳이 매우 많고, 광주(廣州)의 남한산성(南漢山城), 수원(水原)의 독성(禿城), 금천(衿川)의 금지
산(衿之山)은 모두가 특이한 요새로 된 곳이어서 여기를 지키면 호남(湖南)을 방어할 수 있습니
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5일 기묘 80)
"권율(權慄)이 독성(禿城)에서 와 행주(幸州)에서는 병력이 전일보다 나은 것도 아니고 적세가
전번보다 약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아내기도 하고 승전을 하기도 하였던 것은, 단지 그
유리한 지형이 어느 곳인지를 알아서 먼저 점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9일 계사 81)
74) 최홍규, 2009, 『오산시사』 1, 오산시
75) 최홍규, 1996, 「수원지방 3·1운동의 역사적 배경」, 『3·1독립운동과 민족정기』, pp.41~42.
76) 앞의 글(심승구, 2012)
77) 심승구, 1999, 「임진왜란기 군사지휘권의 추이와 성격」, 『임진왜란과 권율장군』, 전쟁기념관.
78) 정해득, 2016, 「고려~조선시대의 오산」, 『오산 박물관 건립을 위한 공청회 자료집』.
79) 『宣祖實錄』 卷43, 宣祖 26年 10月 22日 壬寅.
80) 『宣祖實錄』 卷57, 宣祖 27年 11月 5日 己卯.
81) 『宣祖實錄』 卷57, 宣祖 27年 11月 9日 癸巳.
오산 독산성의 가치성 연구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