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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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庫(火藥庫) 26.5칸(2칸) 1805년 개건 五倉之西南
武庫 3칸 관청 소속 屬軍器庫
西庫 군기고 소속 〃
東庫 군기고 소속 〃
保別庫 군기고 소속 〃
寶積寺 21.5칸 구 세마사 東門內
1831년 수축 이후 약 30여 년간은 독산성에 대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1860년 12월에 수
원유수 김병교는 장계를 올려 1831년 수축한 이후 독산성은 몇 차례의 장맛비로 인해 성첩과 공
해 건물이 모두 무너져서 수보하기 위해서 진제곡 가운데 2,000석을 획급하여 주면 1861년 봄
70)
에 공역을 시작하겠다고 요청하였다. 조정에서는 요청을 받아들여 독산성에 대한 수축 공역
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독산성은 1869년 대원군의 분부에 따라 수원부의 마보군(馬步軍) 가운데 200명과 독산
71)
성에서 50명을 뽑아 정군(正軍)을 만들어 삼군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당시 수원유수 이재원(李
載元)은 유수가 상경(上京)하여 자리를 비울 때, 군무(軍務)에 관계된 것은 전적으로 중군(中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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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위임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삼군부에 제출하여 승인되었다. 대원군시절 까지만
하여도 독산성의 군사력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산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독산성 내의 군사시설이 상당수 파괴된 것
으로 추정되며,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산성 내의 주민도 소개(疏開)되어 독산성은
쇠락(衰落)의 길을 걷게 되고, 1919년 3.1 독립만세의 현장으로 부각되자 일제는 성을 허물어 버
려진 성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독산성은 많은 폭격을 당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데, 인근에 위치한 죽미령 고개에서 이루어진 스미스 부대의 전투와 이를 기념하는 UN군 참전
초전비가 전쟁 당시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957년 ‘세마대중건위원회’가 조직되어 독
산성 내에 ‘세마대’를 복원하였고, 1964년 8월 29일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70) 『日省錄』哲宗 11年 12月 10日 己巳.
71) 『日省錄』高宗 6年 12月 8日 乙巳.
72) 『高宗實錄』권6, 6년 9월 乙未.
오산 독산성의 가치성 연구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