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오산학 연구 5집
P. 64
“둔전을 개간하고 유민(遺民)을 불러 모으는 것이 온당합니다. …중략…그러니 옛 성을 수축
하고 험지에 의거하여 군사 훈련시키는 일등을 독성(禿城)의 예와 같이 한다면 응모자도 많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1월 27일 신축 82)
“고양(高陽)에서 연안(延安)에 이르는 동안의 일로(一路)에는 주민이 단절되어 있으니 독성(禿
城)의 예에 의하여 편리한 지형을 골라서 몇 리쯤 되는 지점마다 결책(結柵)을 연달아 설치하
고…이하생략”
광해군(光海君, 1575~1641) 2년(1610년)에는 비변사가 경기지방 산성의 수리에 대하여 건의
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경기도의 산성 17곳 중에서 수원이 독산성만 유일하게 관리되고
83)
있다는 보고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제왕들은 반드시 성읍을 따로 건설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하였으니, 도읍 옮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교하(交河)는 강화(江華)를 앞에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심히 기이하다.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
행하고 싶다.”고 하여 독산성에 대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84)
독산성은 조선후기 국왕과 왕세자의 행차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인조
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향하던 길에 독산성에 잠시 행차하였으며, 그 후 1750년
(영조26) 영조는 온양온천에 행차한 후 한양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독산성에 올랐다. 이때 영조
는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상고하면서 독산성의 군기를 살피게 하고 궁시와 검극. 기고 등을 수리
하도록 하였다. 1760년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하였다가 돌아가던 도중 장마로 인해 황구
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에 올라가 하룻밤 유숙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사도세자가 진
남루에 올라 활쏘기를 하였다는 사실도 전해진다. 이후 정조는 현륭원 공역이 한창 진행 중이던
1790년 원행에서 직접 독산성에 올라가서 형편을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이루어진 수차례의 국
왕 행차를 통해 독산성이 국왕의 임어처(臨御處)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이 인조대, 숙종대를 거쳐 영조대, 사도세자, 정조대
82) 『宣祖實錄』 卷57, 宣祖 27年 11月 27日 辛丑.
83) 『光海君日記』 卷24, 2年 1月 17日. “備邊司啓曰: "京畿山城, 無慮十七處而一自賊退之後, 漸就廢弛, 唯水原之禿城, 綿綿修葺
矣。 頃日本司議將重修, ‘先擧水原、坡州等三處山城, 其餘仁川、龍津、廣州、高陽等四城, 則將爲漸次措置矣。”
84) 『光海君日記』 卷62, 5年 1月 3日. “王以祕密傳于備邊司曰: "自古帝王, 必有別建城邑, 以備不虞, 非遷都之謂也。交河前對 江華,
形勢甚奇。 欲依禿城山城例, 築城治宮, 以時巡幸”
62 김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