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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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모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 영조 4년(1728년)에 총융청의 건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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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산성 내 봉수가 다시 설치되었다. 현재 독산성 정상부에는 봉수와 관련된 구조물은 남아있
지 않고 1957년에 복원된 세마대가 위치한다. 다만 세마대 주변에 장방형 석재들이 흩어져 있
는데 봉수와 관련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785년경에 편찬된 『수원부읍지』에 기록된 독산성은 “둘레 5리, 성첩 303첩, 높이 3장의 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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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수첩군 11명, 사령 14명, 위전 13명, 군뇌 4명, 비자 2명”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
을 통해 독산성은 항상 군사가 주둔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수축 공역이 진행됨에
따라 산성의 규모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독산성은 정조 대 화성(華城)이 축성될 때까지 여러 차례 수축(修築)되었으며 화성
축성 이후에도 몇 차례 수축이 있었던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각종 연대기 자료와 읍
지 등을 통해 확인된다. 53)
4. 임금의 행차와 정조시대의 수축
독산성은 조선 후기 국왕과 왕세자의 행차가 여러 번 이루어졌던 곳이다. 인조(仁祖, 1595~1649)
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을 피하여 공주로 향하던 길에 독산성에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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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차하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급히 떠난 피난길이었기에 안전을 고려하여 읍성이 허물어진
수원부 관아보다는 독산성을 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750년(영조26) 온양온천에 행차하였던 영조는 한양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독산성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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랐다. 이때 영조는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상고하며, 승지 황경원(黃景源)에게 명하여 독성(禿城)
의 군기(軍器)를 살펴보게 하여 궁시(弓矢)와 검극(劍戟)·기고(旗鼓) 등을 개수(改修)하도록 하
였다. 이때 군사상 요충지인 독산성의 방비와 관련한 전반적인 점검과 보수가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760년(영조36)에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하였다가
돌아가던 도중 장마로 인해 황구지천을 건널 수 없게 되자 독산성에 올라가 하룻밤 유숙(留宿)
50) 『肅宗實錄』 卷22, 肅宗 16年 4月 23日 甲申.
51) 『英祖實錄』 卷82. 英祖 30年 7月 23日.
52) 『輿地圖書』 「水原府邑誌」 禿城山城 “周回五里 城堞三百三牒高三丈 守堞軍十一 使令十四 衛前十三 知印九 軍牢四 婢子二”
53) 정해득, 2009, 『오산시사』 1, 오산시.
54) 『仁祖實錄』 卷5, 2年 3月 9日.
55) 『英祖實錄』卷72, 26年 9月 26日 乙丑.
오산 독산성의 가치성 연구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