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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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했던 바를 이루지 못하고 퇴각함으로써, 한양 주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교두보와 전쟁물자 보
                                      40)
                급로를 확보할 수 없었다.  반면 조선군은 독산성 전투의 승리로 육로와 해로가 열리게 되며
                호남까지 민심이 크게 안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독산성 승첩은 임진년 6월 용인전투의 패배를
                설욕하는 전투인 동시에 한양 탈환의 시발점이 된 전투였다. 무엇보다 독산성 전투는 한수이남

                의 서로(西路)를 확보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3대 대첩으로 평가받는 행주대첩의 승리를 가능
                하게 했던 전투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41)


































                그림 2 독산성 싸움도(정형모 作, 행주산성 대첩 기념관)




                3. 임진왜란 이후의 운영



                 선조 27년 1594년 9월, 임진왜란의 휴전 기간 중 경기감사 유근(柳根, 1549~1627)에 의해 4
                                               42)
                일간의 공역으로 한 차례 수축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2년(선조 35)에는 수원부사를 폐



                40) 유연성, 2014, 『임진왜란기 한양 주변 전투의 전술적 의의』, p.10.
                41) 앞의 글(심승구, 2012, p.148.)
                42) 『宣祖實錄』 卷55, 宣祖 27年 9月 甲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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