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0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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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점에 따라 오산과 그 주변에는 지방의 거점성, 취락유적, 저장·창고시설, 분묘유적들
이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19)
백제시대에 독산성에 대한 구체적인 실체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결국 백제의 지방 거
점은 주로 교통의 결절지에 조성되는 경향성을 보이므로 조선시대에 높게 평가된 육로와 수로
의 수륙양용적 위치는 백제시대부터 유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는 475년 한성백제를 함락하고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하였다.
이 시기에 수원부는 매홀군(買忽郡)이라 불렸으며, 오산지역도 고구려의 지배영역이 되었을 것
이다. 다만 아직까지 오산의 역사와 독산성과 관련한 고구려 점령 시기의 고고학적 자료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553년에는 신라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며 오산지역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
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이후 오산지역을 어떻게 명명하였는지 남아있지 않지만,
삼국통일 이후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수원부의 명칭이 수성군(水城郡)으로 개칭되면서 오
산시 일대는 수성군으로 불리게 된다. 한강유역의 광범위한 지역을 점유한 신라는 각 거점지역
20)
에 치소성(治所城) 으로 산성을 구축하고 군사와 행정의 중심으로 삼았으며, 오산지역의 경우
는 그러한 거점의 치소성으로 독산성이 이용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21)
주지하듯이 한강유역은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으므로 다소 부족한 문헌기록만으로는 독산
성의 축성 주체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독산성의 북동 1치 성곽 보수공사에 따른 발굴
22)
조사를 통해서 삼국시대 초축 시기 원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독산성에서 확인된 삼국
시대의 성벽은 암반을 정지한 후 편축식 구조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있는 외벽이
2~4단뿐이므로 정확한 양상을 알 수는 없었다. 외벽은 방형과 장방형의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
층쌓기 하였고, 체성벽 하부에서 160~180cm 간격으로 가구목 흔적으로 추정되는 주혈이 확인
된다. 기단보축은 단면 삼각형으로 내부는 할석으로 채웠다. 출토 유물은 삼국~통일신라시대
에 걸치는 선문계 와편 소량이 전부이나, 남문 평탄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 시 출토된 통일신
19) 김길식, 2019, 「한성도읍기 백제 산성과 주변유적 네트워크-화성지역 사례를 통하여-」, 『동방성곽지국 : 고대산성 –특별전
<백제의 산성> 연계강좌-』, 한성백제박물관.
20) 심광주, 2019, 「統一新羅 治所城 調査現況과 特徵」, 『쟁점 중부고고학, 무엇이 중요한가?』, 중부고고학회 2019년 정기학술대
회 발표자료집. 치소(治所)는 지방관이 공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관서(官署), 공해(公廨)또는 관아(官衙)라 한다. 치소성은 치
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거나, 치소를 설치한 거점성(據點城)을 말한다.“
21) 이남규, 2019, 『교육·문화도시 오산의 역사문화 바로알기』, 오산시·한신대학교평생교육원·한신대학교박물관.
22) 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19,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3차 정밀발굴조사 용역 약식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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