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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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 제3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18년(AD 373년) 16)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남녀 300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여왔으므로 왕은 이들을 받아들
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독산성의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통해 볼 때, 독산성에서 백제 한성기 4~5
세기대로 판단되는 토기편이나 기와편이 확인되어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17)
높다. 하지만 현재까지 뚜렷하게 조사된 현황은 없으므로, 독산성의 주변에 분포하는 백제 유
적을 통해 일부 유추해 볼 수 있다.
오산에서 확인된 한성백제 시기 취락유적으로는 내삼미동 유적, 외삼미동 유적, 탑동·두곡
동 유적이 있으며, 이들 유적에서는 약 200여 기의 저장수혈을 비롯한 주거지가 함께 조사되었
다. 한성백제의 대규모 저장수혈군은 주로 현재의 용인, 오산, 연기, 논산 등지에 분포하고 있
는데, 이는 주로 한성백제 중앙의 지역사회 재편전략에 의해 조성된 취락 또는 최상위 위계의
유물이 확인된 유적과 일정 거리를 두고 분포하는 특징이 있다. 특히 오산·화성 등의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대단위 저장수혈군은 한성백제가 고대 국가로서 성립·발전하는 과정에서 작용
하였던 기초 경제시스템, 공납과 조세·수치제도의 산물로 해석된다. 18)
또한 오산 수청동 분묘유적은 한성기 경기남부지역 최대 고분군으로서 400여 기의 지역 전통
성이 강한 주구토광묘 및 토광묘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화성지역에서는 오산천의 하류
를 따라 약 13㎞ 정도 지점에 지역의 거점성으로 인정되는 화성 길성리 토성이 있으며, 백제 중
앙의 최상위 위계품인 금동관모(金銅冠帽), 금동신발(金銅飾履), 환두대도(環頭大刀) 등의 유물
이 출토된 화성 요리 유적도 위치한다.
오산천 유역은 한성기 중앙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어 그 영향력이 일찍부터 미쳤던 곳이
었다. 백제의 중앙에서 오산천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그 이남의 진위천·안성천 유역의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화성-오산-평택-천안-공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의 장악, 진위천-안성천-아산
만-서해연안으로 이어지는 물류 수운의 구축 등 복합적 요소들을 모두 갖출 수 있게 함으로써,
16) 『三國史記』 卷3 新羅本紀 奈勿尼師今 十八年 “百濟禿山城主 率人三百來投 王納之 分居六部 百濟王移書曰 兩國和好 約爲兄弟
今大王納我逃民 甚乖和親之意 非所望於大王也 請還之 答曰 民者無常心 故思則來 斁則去 固其所也 大王不患民之不安 而責寡
人 何其甚乎 百濟聞之 不復言 夏五月 京都雨魚”
17) 이형원 외 2인, 2018, 「오산 독산성 백제·신라 유물의 고고학적 의의」, 『烏山學硏究(Ⅳ)』, 오산향토문화연구소.
18) 金王國, 2016, 『백제(百濟) 한성기(漢城期) 저장시설(貯藏施設) 확산(擴散)의 동인(動因) -단면 플라스크형 저장수혈을 중심
으로-』
오산 독산성의 가치성 연구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