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오산학 연구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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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된다. 다음날 사도세자는 진남루에 올라 활쏘기를 하였고, 산성을 둘러본 뒤 “이 성은 들
판 가운데 불룩하게 나와 무릇 이와 같으니 실로 높이 솟아난 곳이 있고 특별히 이루어진 것이
다. 적이 만약 가볍게 여기고 경솔하게 침범한다면 반드시 낭패할 것이다. 권율의 대첩이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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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이다.” 라고 독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평하였다. 또한 창고의 쌀 20석을 성내 민인(民人)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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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궤(供饋)하도록 하였다. 사도세자의 독산성 행차는 이른바 ‘경진년(庚辰年) 경숙(經宿)’으로
불리면서 정조 때 있었던 대대적인 독산성 정비의 한 원인이 되었다. 58)
독산성은 1789년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을 수원부 읍치자리(현재의 융릉)로 천봉한 뒤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독산성이 현륭원의 청룡변에 위치하여 산성의 성벽이 현륭원에서 바라
보였기 때문에 독산성을 그대로 두어야 마땅한지 훼철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원소도감당상 정
민시와 총호사 김익(金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이에 정조는 1790년(정조14) 2월 원행(園幸)
에서 독산성을 친심(親審)하게 된다.
정조는 독산성 운주당(運籌堂)에서 산성의 부로(父老)들을 위로하고 사도세자가 유숙하였을
때의 일을 물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후 명을 내려 부로들에게 자급을 더하고 성내의 민호(民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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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호(戶)마다 미포(米包)를 지급하였다. 1790년 2월 정조의 독산성 친심은 풍수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도세자가 1760년에 행차하여 펼친 사적(事蹟)을 직접 확인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
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산성은 현륭원 외금양지로서 풍수적 문제에 관계 없이 일단 산성을 그
대로 남겨두게 하였다. 60)
독산성은 1792년(정조16) 7월 장맛비에 성첩의 거반이 무너져 내리고, 산록(山麓) 또한 사태
가 많이 났다. 정조는 독산성을 수축하도록 명하는데, 공역을 시작할 때 토지신에게 올리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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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문을 직접 짓는 한편 고유제의 절차와 참여 인원까지 직접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독산성은
1792년 7월 25일 공역을 시작하여 9월 13일에 쌓기를 마치고 20일간 회를 발라 벽돌을 덮어 역
을 끝내게 된다.
이때 수축한 독산성의 규모를 보면, 성의 둘레가 1,004보였고, 그 가운데 신축한 체성이 732
보, 수축한 것이 272보이다. 수문 3곳은 모두 개축하였고, 사태가 난 12곳은 길이 101보, 너비
56) 서울大學校 奎章閣編, 『京畿道邑誌』1, 「水原府邑誌」. 山城.
57) 『華城誌』卷2. 「山城」禿城.
58) 정해득, 2009, 『正祖時代 顯隆園 造成과 水原 移邑 研究』.
59) 『日省錄』 正祖 14年 庚戌 2月 10日.
60) 앞의 글(정해득, 2009, 박사학위논문)
61) 『弘齋全書』第22卷, 祭文4.
56 김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