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오산문화총서 8집
P. 88
22)
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탑동과 두곡동, 가수동 일대에서도 약 90기의 저장수혈
들이 군집을 이루며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시대 백제 생활유적에
서는 유구의 절대다수가 저장수혈들이고, 주거지는 20기 내외로 확인되어 상대적으로 적게 확
인되었다. 규모 또한 크지 않으며, 내부에서 유적의 위계를 가늠할만한 유물들이 출토되지 않아
저장수혈들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삼국시대 백제단계의 분묘문화를 검토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산을 포함
하여 오산천 유역권은 마한의 재지묘제였던 주구토광묘가 4세기를 거쳐 5세기에 이르는 시기까
지 지속적으로 조성된다. 4~5세기는 인접한 화성, 안성에서 이미 백제식 석곽묘나 석실묘, 목
관(곽)묘가 조성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구토광묘가 지속되는 점은 오산지역의 특
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세교지구 일대의 대규모 택지개발에 따른 구제발굴로 조사되었던
23)
오산 수청동 유적에서는 300여기가 넘는 주구토광묘 가 대단위 묘역을 이루며 지속적으로 조
성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토기를 비롯하여 철모, 환두대도와 같이 비교적 시기파악이 용이
한 부장유물의 시기로 볼 때 원삼국시대 후기에서 백제 한성기로 넘어가는 시점인 3세기 후엽
부터 일정규모로 묘역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4~5세기에 들어서 대단위 묘역을 조성해가며 집
중 조성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4~5세기는 한국고고학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구
분 상 백제 한성기에 해당되는데, 수청동 4지점 25호 목관묘에서는 백제 중앙에서 사연한 것으
로 판단되는 청자 반구호(중국제 도자기로서 위세품에 해당됨)가 확인되어 4세기 이후 오산지
역 집단과 백제 중앙과의 교섭을 보여준다. 이는 백제에 일방적으로 복속된 상태가 아니라 지역
24)
집단에 대한 백제의 정치적 포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22) 가수동 유적에서는 신라토기를 공반하는 저장수혈 4기가 확인되었다. 가수동 유적은 삼국시대 백제단계에 조성되어 다수의
저장수혈들이 조성되다가 6세기 이후 신라가 일대에 진출함에 따라 곡간부 일대를 중심으로 신라 주거지들이 조성되고 수리
시설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신라의 진출 이후에도 오산지역은 농업생산에 있어 매우 중요
한 지역에 해당되어 생산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3) 주구토광묘가 모두 경사면에 조성되는 점을 감안하면 주구가 확인되지 않아 단순토광묘로 보고된 분묘도 본래는 주구를 갖
추었을 가능성이 높다.
24) 김성남, 2006, 「百濟 漢城時代 南方領域의 擴大過程과 支配形態 試論」, 『百濟硏究』44,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86 정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