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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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
그림 19. 지곶동 유적 사찰터 및 출토유물 각종(기호문화재연구원 2010)
이상의 내용으로 본다면 몇 가지 역사적인 상황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먼저 지곶동 사찰의 창
건 연대는 출토 유물로 보아 고려 초기로 보인다. 당시 수원의 읍치였던 안녕동 일대에는 용주
사의 전신인 ‘갈양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지곶동 사찰은 현 오산지역의 주민들을 위
해 건립되었던 지역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오산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고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공간으로 유지되었다가 고종 18년(1231년)부터 시작된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그 기
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상이 어떠한 연유로 지곶동 경작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
만 전란의 상황에서 약탈과 방화를 염려한 승려나 주민들이 중요한 물품을 어딘가에 숨겨두었
거나, 또는 전란에 불탄 지곶동 사찰을 대신하여 작은 암자나 민가에 보살상을 모셔두고 기도를
올렸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23)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9, 『重要發見埋藏文化財圖錄』; 오산시, 1998, 『烏山市史』 下; 世宗大學校 博物館, 2005, 『烏山
市의 歷史와 文化遺蹟』; 한신대학교박물관, 2007, 『文化遺蹟分布地圖 -烏山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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