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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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북관(北關,함경도)을 출입한 지 전후 10년에 그의 위명(威名)이 이미 널리 알려져서 군리

               사(軍吏士)가 크게 기뻐하였다. 3년 만에 정부인(貞夫人)이 돌아가니, 공은 50세가 넘었지만 여
               묘살이 3년 동안에 지나친 슬픔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상(喪)을 마친 뒤에는 기보우방어사
               (畿輔右防禦使)가 되었다가, 곧 호남절도사(湖南節度使)로 전직하였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대거 침공하였는데, 우리 국경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선발대가 이미 서울을 육박하
               자 상이 급히 궁궐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 이어 적의 대병(大兵)이 이르러 남한산성

               이 포위당하고, 오랑캐의 위세가 더욱 강성해지자 군사 모집이 하루가 급했다. 공은 즉시 자기
               의 군영에 친히 거느리던 군사를 동원하고, 각 군현에 있는 병사를 두루 모아 충성을 다하여 임
               금을 구하였다. 척후병을 멀리 내보내고 대오(隊伍)를 정돈하여 규율 있게 행동하니, 오랑캐의

               유격병(遊擊兵)이 사방에 있었으나 관망만 할 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직산(稷山)에 이르렀
               을 때 죽산(竹山)에 있는 호서(湖西)의 군사를 오랑캐가 맹렬히 공격하므로, 체찰종사(體察從事)
               박서(朴遾)는 죽산을 우선 구출하려고 하였지만, 공은 ‘임금을 모시는 일이 시급하다.’하고 따르

               지 않았다.


                왕명을 받고 13일 만에 용인(龍仁)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을 쳤으나,

               임금을 모시던 모든 군사가 패전한 뒤였고, 호남 군사만이 남한산성에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기
               세를 몰아 날랜 병사를 내어 오랑캐의 유기(遊騎)를 격파하고 수많은 적의 목을 베니, 오랑캐가

               이를 우려하여 몽골군 공유덕(孔有德), 경중명(耿仲明)의 군사 수만을 모아, 안개 낀 새벽을 틈
               타 일격에 격파하려 하였는데, 그 형세가 풍우(風雨)와 같았다. 그러나 공은 칼을 잡고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서서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보이니, 모든 군사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오랑캐

               도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종일토록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날랜 말을 타고 몰래 後嶺(뒷재)를
               넘어 먼저 上峯(상봉)을 점거하였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공이 급히 용사(勇士) 수백 명

               을 선발하여 앞을 다투어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지금이 바로 충신이 보국(報國)할 때이다.”



                하니, 전투에 임했던 군사가 모두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해 냈다. 오랑캐 중에 갑옷을 입고 기
               (旗)를 들고 있던 자가 말을 봉우리 위에 세운 채 큰 깃발을 들고 무리를 호령하자 무리가 모두

               집합하는 것을 본 공이 그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76  임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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