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오산문화총서 7집
P. 80
손님마다 그가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이명(李溟) 공은 본디 좋은 사이라 자
기 아들에게 사사로이 이르기를,
“그가 어찌 중국(明) 공격하는 것을 도울 사람인가, 그가 병든 것은 사실이다.”
하였다. 이때에 임경업(林慶業), 유림(柳琳)은 모두 내몰려 가도(椵島)와 금주(錦州)의 전투에
나아가게 되었다.
숭정(崇禎) 12년, 우리 인조(仁祖) 18년(1640)에 김해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가 된 지 1년 만
에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로 재임하였으나, 군중(軍中)의 일은 먼저 있었을 때의 약속을 다짐
할 뿐이었다. 다음 해에 심한 병환으로 소(疏)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병든 몸
으로 수레를 타고 10여 리를 달려오다가 관차(館次)에서 객사하니, 그의 나이 57세였다. 이때
남방(南方)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의정(議政) 김류(金瑬), 원두표(元斗杓)가 묘당(廟堂)에 있다
가 부음(訃音)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천명(天命)이구나. 남방에 큰 별이 떨어지더니, 과연 한 훌륭한 장군을 잃었도다.”
하였다. 상(上)이 특별히 명하여 오는 길가의 고을로 하여금 상여(喪輿)를 호송하도록 하고,
유사(有司)에게는 의례(儀禮)에 의하여 부의(賻儀)를 보내게 하였으며, 제문(祭文)을 내려 그의
공로를 칭찬하기를,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해 왔노라.’하였다. 공은 만력 14년(1586, 선조19)
12월 23일에 탄생하여 숭정 15년(1642, 인조20) 11월 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해 12월 12일
양천현(陽川縣) 남산(南山) 종산(宗山)에 안장하였다.
공은 침착하고 굳센 데다가 대략(大略)이 많았고 또 겸손하고 공순한 마음으로 군사를 사랑했
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사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천석(二千石)에서부터 잇달아 원수가
되기까지 어군(禦軍)이 수십 년이었는데, 약속을 엄수하여 상벌을 공정하게 하고, 법을 신중히
적용했고 권세 있는 이에게 아첨하지 않고 개인의 의사를 따르지 않았다. 관청을 자택처럼 여겼
던 것은 돌아가도 거처할 만한 집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며, 거처하고 입고 먹는 것은 소박하기가
열사(列士)로 있을 때와 같았다. 세상을 떠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나 가난하여 모든 상사(喪
事)를 남의 힘에 의해 준비하게 되니, 그를 어질다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광교산(光敎山)에서
78 임종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