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오산문화총서 7집
P. 81

의 대첩(大捷)을 많은 사람이 칭찬하였지만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치욕을 당한 그때에 군사를 거느린 신하로서 산성(山城) 아래에서 죽지 못한 것이 죄
                인데, 오히려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였으니, 그 마음에는 불행히 변란을 당하여 임금이 항복하는 마당에, 신하로서 몸을 희생했

                어야만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니, 오랑캐를 격파한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비록 임무 맡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나 개연히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고 죽음으로 선도(善道)
                를 지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니, 이야말로 충신의 의리이다. 공은 평생 집에서는 효도로 어

                버이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겼고 남과 사귐에 신
                의가 있었다. 이는 선대부(先大夫)가 올바른 행실로 얻은 이름을 공이 이와 같이 잘 지켜서 잃지
                않았던 것이니, 대체로 그의 어짊은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부인 임씨(林氏)의 관향은 순창(淳昌)으로, 군자감 주부 휘 계(繼)의 딸이다. 전현(前賢)의 언
                행을 많이 알아서 조금도 잘못이 없게 할 것으로 자신을 계칙하여 문에 포저(苞苴)나 여알(女謁)

                이 없었으니, 모두 부인이 어질기 때문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16년이 되던 해, 효종(孝宗)
                9년(1658) 12월 18일에 부인이 76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다음해 2월 27일 남산에 부장(祔葬)하

                였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경문(金敬文), 김한문(金漢文), 김인문(金仁文), 김현문(金炫文)

                이요, 사위는 정상(鄭相)이다. 김경문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을 지냈는데, 나이 80세에 수
                작(壽爵)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서임되었으며,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김춘장(金春章), 김진

                원(金振遠), 김형원(金亨遠)이요, 사위는 참봉(參奉) 이온(李蕰)이다. 김진원은 김몽협(金夢協)
                을 낳고, 김형원은 딸만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신필경(申弼卿), 이익휴(李益休)이다. 김한문은
                해서 절도사(海西節度使)를 지냈고, 의금부 도사 김석(金碩)을 낳았으며, 딸 둘을 두었는데, 사

                위는 이진성(李震晟), 윤수손(尹首孫)이다. 김석은 김몽상(金夢商), 김몽량(金夢良)을 낳았는데,
                김몽상은 생원(生員), 김몽량은 훈련원 정(訓鍊院 正)이며, 사위는 안후선(安后宣), 엄집(嚴䌖)
                둘이 있는데, 엄집은 진사(進士)이다. 김인문은 사복시 판관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아들

                김덕원(金德遠)은 형조판서이고, 이분이 낳은 아들 김몽양(金夢陽)은 사간원 정언이며, 딸이 둘
                있는데, 사위는 유헌장(柳憲章), 한종범(韓宗範)이다. 유헌장은 진사(進士)이다. 김현문은 병조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79
   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