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9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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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을 죽이지 않으면 적이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더욱 힘써 전투를 독려하면서 모든 포를 일시에 발사하니(衆砲俱發), 기를 들고 무리를
                호령하던 자와 좌우에 서 있던 추장(酋長) 중에 탄환(彈丸)에 맞아 죽은 자가 여러 사람이었고,

                죽어 넘어진 오랑캐의 수는 헤아릴 수 없도록 많았지만, 전사한 아군은 겨우 수십 명이었다. 크
                게 패한 오랑캐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곳곳에 쌓인 시체를 불태우느라 적진은 온통 울음바다였

                으며 밤은 2경에 가까웠다.
                 이에 공이 군중을 검열하니 포탄과 군량은 벌써 다 떨어져 날이 밝으면 반드시 몰려올 수많은
                오랑캐를 감당할 수 없을 듯했다. 그래서 진지를 이동하여 사병을 쉬게 하려고 곧 횃불을 벌여

                놓아 의병(疑兵)을 만들고서 밤에 몰래 행군했다. 아침이 되어 과연 오랑캐가 몰려왔는데 보루
                (堡壘)가 비었는데도 복병이 겁나서 감히 추격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오랑캐가 패망할 때에 죽
                은 장수 백양고라(白羊高羅)는 오랑캐에서도 귀한 장수로서 전투를 잘하여 공로가 많아서, 선칸

                (先汗)이 사위로 삼아 중히 여겼던 자이다.


                 우리 군사가 밤에 행군하던 도중에 놀라 소란해지면서 군중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주장(主將)을 위해 힘껏 싸워 승리했는데, 창졸간의 변란으로 부질없이 죽는 것은 무익하다.”



                 하고, 모두 흩어졌다. 공이 휘하의 기사(騎士) 수백 명과 더불어 수원(水原,오산 독성산성)에
                이르렀으나 군사가 없는 것이 걱정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모아 계책을 세우려 하였

                다. 그러나 감사(監司) 이시방(李時昉)이 오랑캐가 두려워서 전란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내심 부
                끄러워하고, 또 절도사(節度使,김준룡장군)의 공을 시기하여 이간하는 말로 계문(啓聞)하였고,

                종사 박서(朴遾)도 마음속으로 자기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노여워했던 터라, 상(上)에게 헐
                뜯는 말을 하였다. 공이 죄를 받게 되자 대신(大臣) 이성구(李聖求), 최명길(崔鳴吉)이 승전한 상
                황을 극론하면서 아뢰기를,



                 “공(功)은 많지만 실로 죄(罪)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이시방이 귀양 가고, 공은 죄를 벗어났다. 공은 일이 평정된 뒤에도 늘 어
                영청 중군으로 있었으나, 수년 동안 병으로 인하여 나가지 못하고 자택에 있었는데, 위문 오는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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