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7 - 오산문화총서 7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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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준룡(俊龍), 자는 수부(秀夫), 성은 김씨로 본디 신라 왕의 후예이다. 고려 때에 이

                부 상서(吏部尙書) 거공(巨公)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원주(原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고 원성
                백(原城伯)에 봉함으로써, 자손이 드디어 원주 사람이 되었는데, 원주 김씨는 여기에서 비롯되
                었으며 대대로 현달(顯達)한 사람이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원도공(元度公) 김해(金晐)라는

                분이 있었고 그 5대손에 절도사(節度使) 김말손(金末孫)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는 절도사 박
                영(朴英)과 명망(名望)이 같았던 벗이었다. 당시에 대성(臺省)에 발탁하여 쓰자는 논의가 있었지

                만 기묘년에 많은 사람이 몰락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의 휘는 안우(安祐)인데 젊어서 명예가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성취하지 못하고 좌찬
                성에 추증되었으며, 조부의 휘는 영(瑛)인데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

                으며, 아버지의 휘는 두남(斗南)인데 선조(宣祖) 때의 명인(名人)으로서 남보다 뛰어난 치행(治
                行)이 있어 귀하게 되고, 89세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어머니 정부인(貞夫
                人)은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담양 도호부사(潭陽都護府使) 휘 희필(希弼)의 딸이다.



                 공은 헌칠한 외모에 어려서 장난칠 때부터 벌써 보통 아이와는 같지 않았으므로, 보는 이마다
                거는 기대가 컸다. 만력(萬曆, 명 신종(神宗)의 연호) 36년, 아조(我朝) 선조 41년(1608)에 공이

                23세에 무과(武科)로 출세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또 관무재(觀武才)에 장원하여 훈련원
                주부에 올랐다. 법성 수군만호(法聖水軍萬戶)를 거쳐, 28세에 마량 첨절제사(馬梁僉節制使)가

                되어서는 재능(才能)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가 된 지
                2년 만에 영천군수 겸 조방장(榮川郡守兼助防將)이 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되고 사방에
                기강이 없어지자 상(上,인조)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각 군현의 불법을 살피게 하였는데, 공은

                특별한 치적(治績)으로 표리(表裏,안팎 옷감)를 하사받았고, 다음 해에 북도 병마우후(北道兵馬
                虞候)로 전직하였다가, 그해 겨울에 다시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로 옮겼는데, 또 치적이

                많아서 상으로 표리를 하사받았다. 인동, 회령에 정청비(政淸碑,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가
                있는데, 백성이 추모해왔다.



                 천계(天啓,명明 희종(熹宗)의 연호) 8년, 우리 인조 6년(1628)에 공이 43세로 서해 절도사(西
                海節度使)가 되었다가 곧 교체되고, 겨울에 중화도호부사(中和都護府使)가 되어 1년, 영남절도
                사(嶺南節度使)가 되어 3년 만에 절충장군이 되었는데, 발탁되어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에 제

                배(除拜)되었다.





                                                               광교산전투, 김준룡장군 전승지 답사기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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