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6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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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남김이 많으신 분! 일제시 젊으신 날에 세우신 삼미의숙 백년의 대계이라 길이길이 빛나고

               살 길이 여기 있다.”한 추모비문의 내용을 통하여 다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8)
                윤학영의 선거출마 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여럿의 뜻을 함께
               모아내기 위해서는 활동을 활발하게 펼칠 수 있는 자리도 중요하게 다가왔을 것이라 여긴다.








               Ⅳ. 삼미의숙의 의의





                삼미의숙의 의의는 극빈자들의 자녀들에게 수학(受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도 있겠으
               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이다.

                윤학영은 소작농들이 자립하지 못하고서는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자녀들이 배우지 않고서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하기에 자녀
               들의 학업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소작농이 될 수 있도록 해평윤씨 집안의 토지를 소작할 수 있

               게 하였으며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작지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스스로도 소작인들에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신 소유의 토지를 양도하여 주리라

               약속하였으며 이를 실천하였다.
                이는 1933년 신문기사를 통하여 확인되는 바이다.



                                 甘町步를 買受하야 自作農을創設 四十八戶에分配耕作



                ◇..尹學榮氏特志
                (烏山) 京畿道水原郡城湖面外三美里에서는 今般同里篤志家 尹學榮氏三十六歲의 周旋으로 田
               七町步 沓十三町步 計二十町步를 二萬圓이란 巨額에 買受하야 四十八戶에 自作農을 創設하엿





               18) 各地選擧戰白熱 烏山
                  래 五월 二十一일 일제히 시행되는 부읍면회의원 총선거(府邑面協議會員總選擧)에 관하야 각방면이 모다 비상시하에 정세인만
                치 입후보출마(立候補出馬)는 신구인의 게출 폭주하야 十二인의 게출에 달하엿는데 금일까지에 게출한 씨명은 다음과 같다.
                  金鶴培(現) 宋錫憲(新) 朴富山(新) 兪炳珪(新) 文忠植(新) 全啓鎬(新) 李鳳圭(現) 洪淳克(新) 尹學榮(現) 崔敬烈(現) 李殷敬(新) 徐
                上吉(新) - 동아일보 1939년 5월 7일자



               134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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