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오산학 연구 4집
P. 139
육시키면서 그 부모들에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희망을 주었다. 자신의 토지를 나누어준 것
보다 더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판단한다.
윤학영은 윤학선씨와 함께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담보로 하여 전답을 매입한다. 그리고 48호
에 균등하게 분할하여 농사를 짓게하고 소작료를 받는다. 말하자면 48호가 적금을 드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렇게 15년을 경작하고나면 자신의 소유가 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일방적 수혜가 아
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토지를 소유하여 당당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꿈을 키워
주었던 것이다.
토지의 분할이 전답을 어떻게 나누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정순성씨에게 등기된 농토는
‘전일천일백육십칠평(田壹千壹百六拾七坪)’이었다. 1,167평이라는 땅이 오늘날 얼마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15년간 먹고 살면서 자식들을 공부도 시키면서 농사를 짓고
나서는 자신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꿈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삼미의숙은 단순히 교육기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녀와 부모가 함께 꿈을 키우는
터전이었으며 삼미의숙은 통하여 지역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공
동체운동이며 이웃을 살리는 운동이었고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운동이었다. 오늘날 마을만들기
의 정신으로 비유하자면 거점이었다. 삼미의숙을 거점으로 하여 오늘의 외삼미리가 있고 오산
시의 오늘이 있어온 것이라 하겠다.
20)
삼미의숙 을 운영하는 운영진들은 삼미의숙의 발전만을 꾀하지 않았다. 지역의 각종학교가
동반성장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였다.
20) 烏山大成學院 落成兼學藝會
水原郡 城湖面 烏山里 大成學院은 闕里로부터 烏山新築校舍로 移轉한 以來 아직것 落成式을 行치 못하엿든바 去二十三日 午前
十時부터 該學院內에서 落成式兼 學藝會를 열고 매우 盛況裡에서 進行한바 孔錫政氏의 司會를 비롯하야 經過와 決算報告가
잇슨後 來賓의 祝辭를 맛친後 學藝會를 滋味스럽게 맛치고 下午 三時에 閉會하엿는데 有志 諸氏의 寄附金은 아래와 갓다고(烏
山)
李德興 二十二圓, 孔錫政 千相春 十圓, 孔錫禹 八圓, 孔舜泳 七圓五十錢, 李演植 李明爕 六圓五十錢, 黃秀天 鄭奎英 六圓, 孔錫
根 金●石 兪應濬 朴善日 金溶採 烏山相助會 五圓, 朴敬九 李起亨 孔錫喜 四圓五十錢, 洪鍾學 孔錫穆 朴在根 鄭雲起 馬云先 金
定煥 四圓, 金寬五 金七甫 三圓五十錢, 禹昌順 朝鮮日報烏山支局 光成學院 三圓, 孔孝泳 辛炳云 安優植 南敬辰 禹先必 朴商玉
李永壽 李龍源 金昌洙 李昌卿 金光三 李在寬 李演植 金桂雲 三美義塾 華振學院 朴敏秉 二圓, 李在田 金鍾浩 一圓五十錢, 李思
斗 李化心 崔在鎤 申永俊 禹洪錫 金寬植 李濬元 一圓, 孔完泳 三圓, 李德興 椽木五十本 - 동아일보 1925년 5월 25일자
三美義塾 設立의 意義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