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7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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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데 그 자세한 內容을 드러보면 元來 同里四十八戶은 貧寒하기 짝이업서 全部小作農으로 僅
僅得生하여 옴으로 同里윤학영씨는 一常에 이것을 可矜히생각하야 直接間接으로 이에 對한 救
濟策에 努力하야오던바 今般에 僥倖히 同里區內同里居住人이 大部分小作하야오던 田畓二十町
步가 放賣된다는 傳說을 듯고 前記尹氏는 이것이 동리거주인의 全生命線이며 따라서 우리 洞里
에 이만한 好機가 到來한 것이라 勿失此機하고 此田畓을 買受하야 同里에 自作農을 創設하겟다
一段決心한後 不願家事하고 거의 一個月餘나 寢食까지도 이저버리고 全速力的으로 전답매수에
運動한 결과 天佑神助와 千辛萬苦로 賣主의 承諾은 得하엿으나 그러나 자금이 부족한 관계상
무한한 고통을 격거오던중 당시 오산금융조합이사 伊藤重雄氏의 열성잇는 후원으로 前記尹氏
와 윤학선씨의 사유토지를 저당하고 자금을 借入하야 同田畓을 無難히 買受하야 同里48戶에 평
균분배경작케하고 토지대금상환기한은 15개년간年賦?償還케 한다는데 그상환액이 소작료보다
는 자못 싸다하며 15개년후 에는 48호에 각기사유재산이 되리라고 동리48호에서는 歡聲과 喜
色이 滿面하야 復活의 길를 차젓다는 듯이 본부업에 專心勤勞한다하며 이것을 들은 당지주 인
사들은 前記尹氏에게 無限한 感謝을 表하는 동시에 稱贊不己한다고 한다. 19)
신문으로 윤학영선생의 뜻이 드러났으나 이를 당시의 소작인들로부터 확인할 수 없었는데 지
역의 연구자이자 해평윤씨 집안인 윤의영선생의 노력으로 그 증거를 확보하고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윤의영선생에 의하면 자작농계48인중 1명인 정순성씨가 사망하자 맏아들 정남식에게
등기가 이전되었다는 매도증서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도깨비무늬가 인쇄된 大韓民國政府收入印紙 천환(千圜)짜리 세장이 붙어있고 수입인지 위에
는 尹이라 수결되어있다.
賣渡證書
증서의 우측에는 司法書士 沈相甲이라 되었다. 受附 第 677 號 不動産의 表示
末記와 如함.(貸弊單位切下에 因한 代金壹萬貳千圜也) 此代金 壹百貳拾萬円也
右不動産은 賣渡人所有인 바 前記代金으로써 貴下에게 賣渡하고 代金全部를 確實히
領收함에 對하야 난 後日何等의 異議가 업기로 此證書를 作成하야 左에 記名捺印함.
19) 매일신보(1933.8.19)
三美義塾 設立의 意義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