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3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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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모셨기 때문이다.” 라 한다.


                 1929년 오산공립농잠실습학교(烏山公立農蠶實習學校) 모집정수(募集定數)가 50명(名)이라
                하였는데 1930년 삼미의숙에는 60 여명의 학생이 있다고 보도되었다. 공립학교 보다도 학생수

                가 20%이상 많다는 것은 삼미의숙의 설립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여 주는 자료라
                        16)
                생각한다.







                Ⅲ. 윤학영과 삼미의숙





                 윤학영(1898~1966)선생께서 오산에 끼친 영향은 추모비문의 내용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추모비문을 세우기 위한 발기인으로 오산지역의 유지들이 함께 뜻을 모았는데 그 참여
                자들은 다음과 같다.

                 화성군 오산읍장 한세택, 학교법인 오산학원 이사장 김형태, 화성궐리사 유지회장 고 준덕,
                화성문화원장 유희훈, 오산번영회장 조광현, 오산시가 건설조합대표 공이택, 삼미학교 직원 학

                부형 일동, 삼미 1·2 수리계원 일동, 지방유지 일동이 참여하여 글은 구건, 글씨는 이기춘이 담
                당하였으며 서기 1967년 정미 4월 29일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문
                 선생은 1898년 음 1월 12일 외삼미리 에서 태어나시어

                 1966년 11월27일 가시던 날까지 평생 이 고장에 사셨다.




                15) 수원시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출처의 표기가 되어있지 않지만 여러 정황과 문맥으로 보아 중외일보 1930년 5월 26일
                 자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펴낸 『오산신문·잡지기사자료집』에는 삼미의숙의 원장이 윤국영
                 (尹國榮)으로 기록되고 있는 바, 삼미의숙 개교 당시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확인하여 둘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2009.
                 오산문화원, p317.
                16) 삼미의숙은 학생들의 재능을 발굴하고 향상시키는 데에도 열성을 기우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음의 신문기사를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烏山) 수원군 성호면(水原郡城湖面) 삼미의숙(三美義塾)에서는 오는 十월 十七일 오전 九시부터 동 강당에서 학예회를 거행
                 한다는데 학부형은 물론 일반 내빈도 다수 참석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7년 10월 13일자 三美義塾學藝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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