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1 - 오산학 연구 4집
P. 131
1930년대는 야학당에 대한 기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야학에 생겨나는 이유는 학비
를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동들이 많았던 때문으로 보인다. 1930년 중외일보 기사에
보이는 바와 같이 농토도 재산도 없는 무산계층(無産階層)의 자녀들을 위하여 야학이 개설되었
고 야학은 무료로 교육을 시켰다. 그리고 정규학교를 다니고 있던 아동들도 학비를 감당하지 못
하여 학업을 중단하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 경우도 허다하였을 것이라 여긴다. 1940년 세교리
원촌(元村) 출신 원제완씨의 후원기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2)
Ⅱ-2. 삼미의숙의 설립
삼미의숙의 설립은 오산교육환경이 열악한 것에도 기인하고 있겠으나 해평윤씨문중의 가훈
과 농촌계몽운동과 사회사업 차원에서 삼미의숙의 설립을 주도한 윤학영선생의 의지에서 가능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당시의 신문기사와 관보를 통하여 확인하였듯이 오산의 교육환경은 열악하였다. 나이가
들도록 학업을 이루지 못한 늦깎이 학생들이 있었으며 특히나 무산계층(無産階層)에서는 학교
를 다닌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을 것이라 여긴다.
이에 사학(私學)으로서 삼미의숙의 설립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삼미의숙이 설립되고 7년이
지난 1930년 중외일보의 기사에서 삼미의숙을 취재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三美義塾
城湖面 外三美里에 잇는 三美義塾은 一九二二年 四月分에 그 洞里 尹氏宗中에서 設立한 바
그들의 宗稧 積立金을 醵出하야 數十間의 洋鐵製 校舍까지 建築한 基礎가 튼튼케 된 無産兒童
敎育機關으로 되어 잇다. 現在 任員은 院長 尹國榮, 敎師 尹周榮, 尹萬榮, 柳基冕 諸氏로서 多大
한 熱誠의 活動으로 生徒 六十餘名이 熱心 做工하는 中이며 學科는 普通學校와 가티 한다고 經
12) 極貧兒童에게 學資를 補助
(烏山) 원적을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水原郡城湖面細橋里)에 두고 현재 경성 황금정(黃金町)에서 중앙전기공작소(中央電氣工
作所)를 경영하는 원제완(元濟完-25)군은 고향에 잇는 사립 광성학원(光成學院)에 찾어와서 학동 중 극빈한 생활로 인하야 정
학(停學) 처지에 잇는 아동을 조사하야 당정 면학치 못할 아동 열명의 학자를 담당하고 상경하여 신학기분부터 금十원을 학원
으로 보내고 “앞으로도 극빈한 생활로 인하여 정학을 당하게 되는 아동이 잇거던 바로 기별하야 주면 전부 자기가 담당을 하겟
다”고 굳센 의지의 말로 편지를 하여 동 학원에선 이 원(元)군의 독지(篤志)에 감격하여 마지 안흘뿐더러 일반에선 칭찬과 감사
의 한 화제가 되어잇다. 이에 혜택을 받을 아동에게는 얼마나 한 서광이 빛이랴! 보아라. 쌍수를 거하야 군호를 늘려 감사를 올
리는 동시 유위(有爲)의 인재(人才)가 되길 빈다. 이에서 원(元)군에 보은(報恩)될 것이다. 동아일보 1940년 5월 7일자
三美義塾 設立의 意義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