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2 - 오산학 연구 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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費는 後援會費와 學生 月謝金外 特別이 尹氏 宗中에서 補助하여 주는 若干의 金錢으로 充當한
다는 바 級數는 四學級이고 여기에 特異한 感을 늣기게 되는 것은 無産兒들 中에도 極貧으로 就
學치 못하는 者에게는 그 學父兄에게 小作地를 엇어주어서 그것의 收穫으로 學費를 充當케 한
다는 것이니 이것은 眞實로 우리 無産者의 子女를 敎育시키고저 하는데 한 模範이 될 만한 것이
다. 13)
삼미의숙은 해평윤씨 종중에서 설립하였으며, 학비는 낼 수 있는 학생들에게는 학비를 받았
지만 대개의 학생들은 삼미의숙으로 들어오는 후원회비와 윤씨 종중의 돈으로 보조하였던 것으
로 보인다. 그리고 학생의 학부형에게는 소작지를 얻어주고 그 수입으로 학비를 내도록 하였다
고 하였다. 무조건 무료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줌으로
써 지속성을 갖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일반 사회사업으로서의 야학의 운영과는 차별화된 운영방
식이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삼미의숙의 운영 내지 경영방식이 무산계층을 하여금 동
기를 유발시키고 스스로 자격을 갖춰 자립을 돕고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례이며 모범
이라고 생각한다.
『수원시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삼미의숙에 관한 글을 보니 중외일보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작
14)
성된 듯 한데 사실관계등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외삼미 해
평윤씨 집안의 후손인 윤의영 선생의 미발표 원고에 의하면 “삼미의숙은 1922년 삼미종중을 중
심으로 외삼미리 몇 몇 유지들과 함께 삼미의숙 설립을 논의하여 준비하였으며 1923년4월4일
개교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25년 삼미의숙에서 용인 서천리의 해주오씨 오덕영에
게 전달한 감사장에 의숙장(義塾長) 윤정선, 재무(財務) 윤학영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1902년
문시면장을 역임하였으며, 윤학영의 조부항렬인 윤정선(1863~1929)을 삼미의숙의 학교장으로
13) 水原無産兒童. 敎育機關巡訪(五). 중외일보 1930년 5월 26일자
14) 삼미의숙
성호면 외삼미리에 있었던 삼미의숙(三美義塾)은 1922년 4월에 윤씨 종중에서 설립한 것으로 윤씨 종계(宗契) 적립금을 출자
하여 양철로 된 교사까지 건축하였다. 원장은 윤학영(尹學榮), 교사는 윤주영(尹周榮)·윤만영(尹萬榮)·류기면(柳基冕) 등이
었다. 학생은 60여 명으로 4개 학급이었다. 경비는 후원회비와 학생들의 월사금 및 윤씨 문중의 보조금으로 충당하였다. 특
이한 점은 무산아동 가운데 너무 가난하여 취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학부형에게 소작지(小作地)를 얻어 주어 그 수확으
로학비를 충당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역 공동체적 배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녀교육의 모범사례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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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김용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