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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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백제 진사왕은 한수 이북의 10여성과 관미성을 되찾고자 고심한다. 구원행궁狗原行宮
에 머물러 왜의 원군을 기다리며 관미성 탈환을 위한 전략을 짜고 군사들을 조련하였다. 그러
나 백제 진사왕 여휘는 군사를 잘 부리는 광개토왕의 전략에 휘말려 번번이 패배하고 만다. 그
러다가 그의 조카 여방餘芳의 정치세력과 왜왕 응신천황 예전譽田이 보낸 왜장들에게 시해되
었다.
고구려는 고을을 홀忽>고흘>고을로, 산언덕은 원原으로 이름 지어 물렀다. 그리고 백제는
고을을 성城=邑城으로, 산언덕은 원原으로 이름 지어 불렀다. 백제는 지금의 수원과 용인을
모수성牟水城과 모로성牟盧城으로 불렀다. 그리고 고구려는 지금의 수원과 용인을 매홀현買
忽縣, 구성현駒城縣으로 칭명하였다. 그러므로 구천狗川이 흐르는 수원水原은 곧 구원狗原인
것이다.
백제 진사왕이 사냥으로 군사들을 훈련하다 시해된 구원狗原은 경기도 수원水原이다. 삼국
사기에 등장하는 구원狗原을 지금의 용인 구성駒城과 수원水原의 약칭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
이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5 화산花山의 수원고읍성터에 백제 때의 토성이 남았다. 백제
진사왕이 머문 구원행궁狗原行宮과 조선 정조대왕이 세운 수원행궁水原行宮이 시공을 초월하
여 동일한 지역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구원행궁狗原行宮에 비정되는 수원고읍성터는 조선 정조대왕의 의도에 따라 사도세자의 능
원인 현융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수원고읍성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원행궁狗原行
宮은 수원시 팔달산 아래로 이전되어 화성행궁華城行宮으로 자리 잡았다.
현융원(구원행궁) 화성행궁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