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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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차에 기인한다. 화산에 묻힌 사도세자의 융릉으로 향하는 어가御駕의 행렬이 구천狗川을 건
너면서 구천狗川은 황구지천皇口之川으로 바뀌어 불렸다. ‘황제皇帝의 행렬이 들어口 가는之
개천川’이라는 의미로 변경되었다. 화산릉으로 향하던 정조대왕 어가의 행렬이 건너던 돌다리
또한 대황교大皇橋로 칭명되었다. 지금의 수원시 대황교동이 이때에 유래되었으며 돌다리 대
황교의 일부는 사도세자의 능묘가 있는 현융원에 복원되었다.
황구지천은 수원시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가 대황교동에서 모여 이루는 개천이다. 지
금도 수원의 너른 들을 흐르는 개천의 이름은 황구지천皇口之川, 서호천西湖川, 장다리천長
川, 유천柳川, 원천遠川인바, 이들 하천이 흐르는 너른 들은 곧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등장하
는 구원狗原이요. 구원狗原은 곧 지금의 수원水原에 비정되는 것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도읍 하남(직산) 위례성이 정돈되자 곧 바로 위례성의 북쪽인 용인에
마수성馬首城과 병산책甁山柵을 세워 말갈의 침입을 막았다. 그리고 마한왕馬韓王과 친교하
며 독산책禿山柵과 구천책狗川柵을 쌓아 말갈과 낙랑의 교통로를 차단하였다.
백제 온조왕의 행동에 낙랑태수는 분개하였다. 이제까지 낙랑의 영지로 다스려오던 기전畿
甸=京畿의 땅을 백제 온조왕에게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곧 온조왕의 의도가 장차 낙
랑樂浪에 대항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독산禿山에 성책을 세워 하팔현河八縣(평택)에서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감시하고 구
천狗川에 성책을 세워 미추홀彌鄒忽(인천)과 당항성黨項城(남양만)으로 나가는 통로를 장악하
면 기전(경기)의 산물은 모두 백제의 소유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수원시 고색동古塞洞에는 백제의 구천책狗川柵에 비정되는 토루土壘가 존재한다.
당초 장방형의 고총으로 인식되었으나 발굴 결과 무덤이 아니었다. 단지 후대에 묻은 3구의
인골 이외에는 이렇다 할 유물이나 토석이 출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유물은 고총으로 인식
하기보다는 황구지천을 따라 구축되었던 토성의 요새要塞로 보아 마땅하다. 이것이 최근에 이
르러 수원-남양을 잇는 도로 공사에 의하여 끊겨진 구천책의 잔재로 보인다. 이 마을의 이름
이 고색동古塞洞이라는 데에서도 그 의미를 넉넉히 찾을 수 있었다.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