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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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책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다. 실제로 수원시 고색동에는 황구지천을 따라 쌓은 토성이 남아

                있다. 수원시 고색동古塞洞의 고새古塞에 ‘오래된 요새’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백제 온조왕이 독산과 구천에 책柵을 세운 것은 동쪽의 말갈과 서쪽의 낙랑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성책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2) 독산禿山과 구원狗原의 위치



                  ① 독산禿山의 위치
                  백제 온조왕대 등장하는 독산禿山은 말 그대로 독禿을 두었다는 산이다. 혹자는 독산禿山을

                ‘대머리 독禿’에 비추어 민둥산 또는 헐벗은 산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의 침입
                을 방어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어 민둥산이 되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독禿’ 자에
                집착한 견강부회일 뿐이다. 오산시 독산의 독禿은 ‘대머리 독’이 아니라 ‘쌀 독’의 의미를 가지

                는 것이다. 이는 곧 독산에 위치한 독성이 옛날부터 사창社倉의 역할을 담당하던 성책이었음
                을 의미한다.
                  경기도 수원의 광교산에서 발원한 황구지천은 수원의 너른 들판을 지나 독산을 감아 돌고

                진위천, 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만으로 흐른다. 독산은 수원의 너른 들판에서 생산 된 벼를 모
                아 아산만 하구의 하양창으로 실어 나르는 사창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독산성

                부근의 화성시 정남면 사창리에 조선시대의 사창터가 남아 있어 이를 증거한다. 그 위치는 화
                성시 양감면 사창리 409 사창초등학교 자리이다. 또한 독산禿山은 병산甁山, 한산漢山과 마찬
                가지로 백제 온조왕 초기의 외자 이름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다음은 독성이 독산성으로 불리는 까닭을 고증하는 자료이다. 화산 용주사가 펴낸 ‘용주사의
                           25)
                말사 보적사’ 에 기록된 내용이다.


                    독산성은 백제 때의 산성으로 도성의 문호와 관련된 전략상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광주목사 권율(權慄)은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던 곳으
                    로도 유명하다. 장군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에 왜장이 성안으로 마실 물 한 지게를 올려 보냈
                    다. 독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물 한 지게의 전략으로 권율을 조롱하며 항복을 재
                    촉하였던 것이다.





                25) 용주사의 말사 보적사, 용주사홈페이지.



                                                             독성려왕릉禿城麗王陵의 정체에 대한 小考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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