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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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점을 중시하며 수원시의 화성과 연계된 한 쌍의 성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독산성에는 정조와 사도세자의 사적이 있는 곳으로, 이 독산성도 정조와 관련된 산성이
기도 하다. 아버지의 경진년경숙(사도세자의 독산성 운주당에서의 숙박)으로 각별하게 생각하
여 정조는 독산성을 존치시키며 유지했던 것이다.
*화성궐리사
오산시 매홀로 3에 소재하고 있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화성궐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건물이며, 전시관과 강당은 우진각 지붕에 골기와를 얹은 전통 한식 양식으로
건립되었고, 2009년 8월에는 궁궐식 양식의 행단이 건립되었는데, 이 행단은 우리나라의 유
일한 행단이 되었다.
이 화성궐리사는 정조16년인 1792년에 정조의 칙명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이다. 정조가 화
성궐리사를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현재의 궐동)에 창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
다.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죄인의 자식으로 전
락하여 갖은 파란을 겪으며 1776년(영조52년)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제22대 임금에 등극한다.
왕위에 오르게 된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개혁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기반을 닦고 왕권을 회복
한 후 숙원이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옮겨, 점차 능으로 격상시키는
완전한 복권을 도모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던 당시에는 신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왕권이 쇄
미했다. 이미 서울은 노론 신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론 일당 세력에
다른 당인 세력이 대항하기는 역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을 타파 전환시키기
위해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수원을 신도시의 거점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권의 강화를 구체화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의 호응이었다. 정조가 믿
을 수 있는 세력은 백성의 힘과 유림뿐이었다. 정조는 선대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개혁의 명분
으로 학문을 앞세우는 정치를 하며,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바꿔가는 길을 선택한다.
서울에 버금가는 신도시의 개창 필요성은 이러한 왕권 강화책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제2의 왕도격인 신도시를 현 수원시에 화성을 건설하여 군사와 경제의 강화를 도모하여 정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