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4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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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적인 힘을 키우고자 했다면, 현 오산시 궐동에 공자 사당인 화성궐리사를 개설한 것은 이곳을 조
                   선 유림의 총본산으로 만들어 유림들로 하여금 주자가 공자를 해석한 주자학(성리학)이 아니라 공

                   자 본래의 가르침 그대로의 충(忠) 사상을 통해 단합된 그들의 힘을 정조 자신에게로 집중케 하는
                   것이 왕권 강화를 위한 실질적 대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 사상적인 강화를
                   통해 정치적 힘을 키우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의 백성, 즉 자신의 백성들 삶을 책임지는 따뜻한 왕권의 단초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의중을 담고 정조는 경기 감사에 명해 공부자의 성문을 보수토록 하고 공자가 살았던
               중국 노나라에 있던 궐리사를 본떠 사액하고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의 동명을 궐리로 개
               칭케 하니 이로부터 화성궐리사란 공자의 성묘가 이 땅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화성궐리사가 수원의 화성과 팩키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하는 요점은 수원시의 화
                   성이 정조의 경제, 군사적 왕권 강화책이라면, 오산시의 화성궐리사는 정신적, 사상적 왕권 강화책
                   인 것이다.
                   이러한 점이 합해졌을 때 화성도 완벽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화성궐리사도 수원시의 화성과 한

                   쌍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점이다.


                 화성, 독산성, 화성궐리사, 용주사는 정조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이 모든 문화재는

               당시 수원부 영역 안에 있던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이 수원시가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원부(화성부)가 주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
                   하다.


























               152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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