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9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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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마대 중건기



                  (세마대 현판에서 옮겨 적은이 : 남경식 오산향토문화연구소 상임위원)



                  독산성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성으로서 선조 25년(옮긴이 주 1592년) 임진왜란 시 삼남 의
                용병 13만 대병이 일시 집결하였던 요새지이다.

                  그 후 도원수 권율장군이 유진하여 식수 부족의 위기 모면책으로서 백미로 백마를 목욕시키
                는 양의 묘안의 병법으로서 왜적 3만여 명을 격퇴하고 3천병마곡에서 격멸하였었다.
                  그 후 이곳에서 권율장군은 변이중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최초의 화포를 발명 제조례하여 이

                화포로 행주대첩의 대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이곳에 세마대를 장엄하게 세우고 석대산을 세마산이라 칭하여 병
                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하고 방어사 유진장 독산성별장 등을 서수하였다.

                  영조 26년(옮긴이 주 1750년) 9월 26일 대왕이 친림 순행하시고 군기 수련을 엄명하시어 더
                욱 더 완강히 하고 비조불입의 석성이 둘러싸여 금성천부지지라 하였다.
                  정조 16년(옮긴이 주 1792년) 10월 3일에 세마대를 중수하였고 지성 지효하신 대왕은 부왕

                을 인근인 융릉에 모시고 세마산을 향로봉이라 칭호하셨다.
                  수원 유수부 중군도가 되고 군부 중심지가 되어 300여호 대촌의 도심지가 되었다.

                  경술년 한일합방(옮긴이 주 1910년) 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거민은 각처로 분산되
                어 현재는 보적사와 폐허로 된 황성과 성문만이 남아 있다.
                  풍진 풍우 50여년 만에 초석만 남은 옛터에 단기 4290년(옮긴이 주 1957년) 8월 15일을 기

                하여 독산성 세마대 고적중건위원회의 위원장 유희훈에 의하여 세마대는 중건 복구되었고 산
                악지대 통행로 30여리의 신설 도로와 산상에 대소 광장 2개소가 신설되었다.

                  본 공사는 무너진 역사를 다시 빛내고 민족정기 앙양에 무언의 지침이 되기를 기원하여 자
                금난으로 누차 중단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고경에 처하였으며 4개 성상에 긍하여 천신만고로 경
                비조달에 노력하였다.

                  본 공사비는 세마대 공사비 434만 1370환, 보수공사비 272만 5000환을 합하여 706만 6370
                환이 소요되었다. 그 재원은 국, 도비 보조금 150만환과 위원장의 희사금 285만여환으로 충당
                하고 각계각층의 협조와 지방민의 노력으로서 준공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단기 4290년 8월 15일 (옮긴이 주 1957년 8월 15일)
                                               화성교육장 정형모 근기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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