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7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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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별장 과수원 터, 한호빌라, 2002                 박영효별장 마구간 터, 황덕사, 2002


                  박영효가 말년에 살았다는 박영효별장은 버려진 공터로 남아 있다가 유림각호텔 터와 함께
                현재는 다세대 주택을 짓고 있다. 2002년도에 필자는 그의 행적과 그의 별장에 대해 조사한바
                가 있다. 당시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채록하여 정리한 내용을 적은 조사서를 인용해본다.



                    “2002년 10월 17일 오후 2시 반경 박영효가 살았다는 그의 별장 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곳에
                    가보니 그의 별장이 있던 자리에는 무, 배추밭으로 가을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지금은
                    그곳이 오산시 은계동 64번지이지만 은계동이 오산시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동탄면 금곡리였다. 별
                    장은 양철지붕으로 된 단층이었고, 방이 네 개였는데 마을사람들은 그 집을 궐집 또는 궁집으로 불

                    렀다. 그 집은 195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대문은 솟을 대문으로 대한문을 본떴는데, 크기는
                    대한문의 3분지 2였다니 대단히 웅장하고 컸었다. 별장은 정원을 곁들였는데, 2천여 평이 넘었다고
                    한다. 박영효는 중국인을 고용하여 앞 텃밭에 토마토를 재배하였다. 그의 기침소리는 온 마을을 쩌
                    렁쩌렁 울리게 하였고, 걸음걸이도 양반으로 위풍당당하였다. 오산3·1만세운동 때에도 이 마을에
                    는 왜인 순사들이 얼씬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산3·1만세운동에 가담했던 마을사람들도 모
                    두 무사했다 한다. 지금 천태종 황덕사가 있는 곳에 마굿간이 있었는데, 한 번에 대여섯 필을 수용
                    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가 말년에 낙향하여 직접 마을사람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집 안팎일을 보
                    살폈는데 품삯은 후했다고 한다. 별장은 아름다웠는데 청단풍나무(이 당시는 아주 귀한 나무였다
                    고 한다)가 있었고, 그 나무를 중심으로 로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구기자나무와 산수유나무를

                    심었다. 박영효가 그 곳에 머물 때는 뒷산에서 일본순사가 보초를 설 때도 종종 있었다. 뒷산 너머
                    에 그의 과수원이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이 박영효의 과수원이 있던 그 곳을 박동이라고 불렀다. 지
                    금은 한호빌라가 있는 뒷산과 상수도 물탱크가 있는 자리로 과수원 면적은 상당히 넓었다.”


                  박영효 별장은 1957년 화재로 소실되어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나마 무, 배추밭으로 존재




                                                           새롭게 기억하고, 기록되어야 할 오산이야기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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