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오산학 연구 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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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숨을 거두게 되는 사도
               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늘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
               母恩重經> 설법을 듣게 되고, 크게 감동하여 절을 세우고, 경기도 양주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

               곳 화산으로 이전한다.
                 그리고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 이었다한

               다. 이에 연유하여 용주사로 불렸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로 어우러지게 되었다 한다.
                 당시는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시대로서 왕이 불사를 한다는 행위는 많은 비난에 직면하는 일

               이었다. 이점만 보더라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진혼을 위해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용주사는 일반적인 다른 사찰과는 다른 구조와 특징을 갖고 있다. 절 입구에
               사천왕문이 있어야할 자리에 궁궐의 대문처럼 보이는 삼문각이 만들어져 있고, 그 양옆으론

               마치 사대부집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길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절기마다 찾아오는
               왕의 행차에 필요한 사용처였는지 모른다.
                 이밖에도 정조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데, 대웅보전이 정조의 친필이며, 용주사 창건문, 상량

               문도 정조가 직접 쓴 것이다. 용주사 창건기 상, 하권도 경건한 필체로 직접 쓴 것으로 전해지
               고 있다. 이것도 아버지의 진혼을 위한 것이다.

                 이 용주사는 융릉의 원찰로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한 정조의 절절한 효심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우리는 정조의 효를 이 용주사와 융릉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산 독산성



                 높은 산에는 산성, 나지막한 산에는 토성, 평지나 바닷가에는 평성인 읍성이 있다. 평시에는
               읍성에서 활동하고, 유사시에는 산성으로 피해 대비한다.
                 독산성은 백제시대의 오래된 산성으로 알려져 있는 성으로서 토성이었던 것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석성으로 재수축했다.


                   수원부가 현 융릉자리인 화산에 있을 때는 평성인 수원고읍성과 한 쌍을 이루어 산성으로 독산성

                   이 존재했으며, 1789년(정조13년) 수원부가 사도세자의 능침이 되며 수원 화성 안(화성행궁)으로 옮
                   기면서도 독산성은 전시에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성을 지키는 산성으로 존재해 왔다.




               150  남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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