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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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봉화를 올린 곳이라고도 전한다. 그런데 이 필봉산에 예전에 큰 절이 있
었고, 암자가 셋이 있었다고 한다. 암자 중 산 중턱에 대덕암(大德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여기에도 유명한 전설이 전해진다.
“이 암자에는 물맛이 좋은 샘물이 있었다. 어느 날 방년 19세 먹은 처녀가 암자에
기도하려고 왔다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분노하여 이 샘에 빠져 죽었다. 처녀가 빠
져 죽은 날 밤에 어느 장사가 그 샘물을 큰 바위로 막으니 그곳의 암자는 없어졌다
고 한다. 그 후에 마을 주민들이 샘물을 이용하고 처녀의 시신을 꺼내려고 하였으
나 바위가 움직이지 않아 꺼내지 못하였다. 그 샘물 옆으로 농바위가 있는데 이 바
위가 밤만 되면 능구렁이 우는 소리를 오랜 세월 동안 냈다.”고 하며, 그 후 어떤
사람은 그 농바위 밑에서 산삼을 캤다고도 전한다.
달봉재에서 달맞이를 하고, 문인들은 시회를 하고, 무인들은 사장터에서 활쏘기를
하였으나, 지금은 산천이나 말하고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옛일이 되어 그립다고 말
한다.
<내삼미2동>
내삼미1동과 마찬가지로 삼미였으나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로를 중심으로 서
쪽이 내삼미2동이다. 내삼미 2동 지역은 해평 윤씨와 해주 최씨가 대성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중 윤씨가 가장 많이 살았는데, 현재는 개발이 진행되면서 자
연마을은 거의 훼손된 상태이다.
■ 검디(마을)
내삼미2동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문헌서원이 있는 곳이다. 마을 지
명의 연유는 잘 모른다고 하나, 일설에는 마을 앞에 예전에 수렁이 많아 나무로 수
렁에 빠지지 않도록 징검다리를 놓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소
가 빠지면 못 나올 정도의 수렁이었다 하며, 그런 연유로 이곳은 농사도 짓지 않았
다 한다.
■ 죽미(마을)
내삼미2동의 서쪽 죽미령고개 밑이며, 중미(中美) 혹은 죽밑, 죽밋이라고도 불렸다.
마을에 예전에 대나무가 많아 붙여졌다고 전한다. 1863년에 발간된『대동지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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