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9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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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수원의 팔달산 밑에 화성을 축성하시고 천도하려 하였으
나 중신들의 반대로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능행차만 자주 다니셨다. 어느 날 정조
대왕은 원삼에 대령하고 있는 수원 유수를 불러, 이곳 고을의 이름을 물으시니, 문
시백 송산림이라고 아뢰니, 대왕께서 능행차를 하실 때에 다시 수원 유수에게 고을
이름을 물으시니 문시백 필봉동이라 아뢰니, 왕께서 이곳의 사면 주위를 관망하시
고는 송산골은 금로 대송이 울창하고 아름다우며, 점이골(현재의 죽미령)은 대나무
골과 대량골에 대나무가 아름다우며, 문시와 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구나. 이제
이곳을 삼미(三美)라 칭하라 하시어 삼미가 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삼미라 칭하여 오던 중,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경부선 철도와 도로가 횡단
됨으로서, 반월봉을 능선으로 하여 외삼미리와 내삼미리가 분리되고, 내삼미리에서
수청리가 분리되고 또다시 철로를 경계로 내삼미리가 1리와 2리로 분리되었다. 반
월봉은 6․25전쟁 당시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의 스미스부대가 공산군과 처
음 접전한 전적지인 죽미령에 이어져 필봉산 주용(走龍)의 좌우로 계곡에 따라 신
동, 구삿, 송막, 당귀, 가재울, 수류곡, 달래곡, 은산재로 형성되었는데, 신동에는
신씨가, 구삿에는 구씨가, 송막골에는 송씨가, 당귀애는 당씨가 살았고, 가재울은
샘물지이며, 달래곡은 달래사(達來寺)가 있었고, 은산재에는 수청말이 있었다. 필봉
산 동룡에는 투구봉 장군대좌가 있고, 동남룡이 금반향인데, 장군 대좌묘와 투구봉
에 얽힌 이야기는 내삼미1동의 용인 이씨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다음과 같다.
“옛날 용인 이씨 집안에 조선조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분이 계신데, 어느 날 역학지
사 선생이 마을을 지나자 들러 집안에 장사가 날 것이라고 하더니, 때마침 생남하
였는데 이 아이가 날 때부터 이가 났고, 겨드랑이 밑에 날갯죽지가 돋쳤으며 눈에
서는 독특한 광채가 빛을 발하였다. 집안 식구 모두가 기이하고 놀라 중추부사를
모시고 가족회의를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이 아기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아기를 잡아뉘고 맷돌을 올려놓아도 죽지를 않아서 방치돌을 올려놓으니 아기가 말
하기를 ‘왜 나를 죽이려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너를 살려두면 삼대가 멸문하는
역적 집안으로 어쩔 수 없다.’고 한즉 ‘내가 살아도 역적은 안됩니다.’하니 ‘네가 죽
어야 집안이 무사하다.’고 하면서 죽으라고 이르니 ‘내가 죽어서 집안이 잘 되고 무
사하다면 죽겠는데, 그냥은 절대로 죽지 않으니 저를 죽이려면 날갯죽지를 잡아 뽑
아야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날갯죽지를 뽑으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면서, 투구
봉과 금반향지간의 산이 갈라지면서, 용마가 어흥 소리를 내며 달려 나와 동탄 구
산을 딛고 용인 쪽으로 날아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 후세인들이 구산
에 미륵을 세우고 빈다고 한다.
동탄면사무소 옆 구산에는 미륵이 있으며 이 일대를 미륵뎅이, 미륵동이라고 부른
다. 내삼미동을 안삼미, 안삼미실, 안삼미곡 등으로 부르는데 필봉산은 아주 오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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