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오산시 지명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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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동(新場洞)
1989년 궐리의 일부와 수청리, 금암리, 내삼미 1리와 2리, 은계리를 통합하여 10통
70반으로 동이 되었다. 원래 1789년(정조 13)에는 시봉면, 삼미면 지역이었으며,
1899년에는 문시면 지역과 초평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문시, 초평, 그리고 어
탄면으로도 포함되었었다. 신장동 지역은 조선시대 중규면 구정촌이라는 색다른 지
명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규면이라는 지명은 다른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나
타나지 않는다(공씨 족보에 등장). 신장동은 오산화성궐리사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마을 형성에 크게 이바지한 곳으로 최근에는 대형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한때 오산의 6개 동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였다.
■ 새장터(마을)
신장동의 궐동에 있는 땅이름이다. 6·25한국전쟁 이후 오산천변에 새로 생긴 장터
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새장터(쇠장터)라고도 불렸다. 오산동의 싸전시장(구장터)
의 대항적 시장이기도 하였는데, 우시장만이 형성되어 남으며, 이 우시장도 청학동
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발안으로 이전되고 우시장은 없어졌다. 예전에는 이곳의
우시장이 유명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새장터의 한자 이름이 신장동(新場洞)이다.
(1) 내삼미동(內三美洞)
삼미동은 원래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 불렸는데 조선시
대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천봉할 때 행차하여 경기도관
찰사에게 마을 이름을 물으니, ‘문시면 송리’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정조가 “문시에
는 오동나무, 죽미에는 대나무, 삼미에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많으니 삼미라고 부르
라” 하여 삼미가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안쪽은 ‘안삼미’ 즉 내삼미가 되었으며,
바깥쪽은 외삼미가 되었다고 전한다.
<내삼미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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