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오산문화총서 8집
P. 44
Ⅳ. 문헌자료 내 독산성 문지의 검토
독산성에 대한 문헌기록의 검토를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대한 문헌기록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서 독산(禿山, 獨山)이라는 명칭이 몇 번 확인되었으나, 동일 지명
인지는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조선 초기의 각 지역의 실정을 파악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남양과 수원의 내용을 살펴봐도 독산성을 고성으로도 인지하고 있
지 않다. 월사집이나 만기요람 등에서도 고성에 대한 언급이 없고, 처음 만들어졌던 것으로 인
식했던 것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의 독산성의 경관은 1592~93년에 본격적으로 조성
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표 5. 독산성과 관련된 ‘문門’의 문헌기록
연도 내용 출처
유염이 이미 성에서 나와서 돌아갈 곳이 없고 또 죄를 얻을까 두려워
서애선생문집 별집
정유년(1592) 밤중에 독성을 찾아가 성을 같이 지키자고 입성을 요구했으나, 조발은
제4권 잡저
성문 열기를 기뻐하지 않으면서...
독성산성 남쪽으로 30리이다. 선조 25년에 고성을 쌓았다. 정종 20년에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중종25) 1천 8백 보로 개축하였으며 문이 넷이다. 선조35년에 부사 변응성이 (*대동지지
쌓았다. 동일내용)
운주당의 남쪽에 있다. 영조 계유년(1753)에 중수하였다. ... 변후가 성의
남쪽 모퉁이 깍아지른 벼랑, 깊은 골짜기 위에 초루를 세워 나그네들이
1603(선조36) 모이는 곳으로 삼았는데, 제법 넓고 전망이 틔어 좋았다. 진남루라 화성지
명명하고 나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 성이 세워진 전말을
적어서 주노라. 만력 31년 계묘 계추이다.
성의 남쪽에 옛날에 루가 있어 ‘진남루’라 하였고 ... 대들도 위의 필적으로
보건데 루는 기해년(선조32, 1599)에 창건하였고, 병진년(효종10,1659)에
화성지
1753년(영조29) 중수하였으니 여수가 오래되어 움직이고 기울어 용마루가 흔들리고,
독산성중수기
기둥이 꺽어져 얼마가지 않아 무너져 내릴 지경.. 그 옛 터에 초석을 고쳐
놓고 기와를 윤환하여 바꾸었다.
.. 봉두에 성을 쌓았다. 4면이 두절되어 있고, 둘레는 3리이며 성 가운데
창오(곳집)을 배치하였다. 민가는 백 수십가에 지나지 않지만 꼴을
기를 곳이 없다. 그 루를 “진남루”라 하는데 이곳이 관사의 정당이다.
1831년(순조31) ... 장헌세자께서 온천에 행차하셨다가 마친 남쪽다리가 물이 불어나 화성지
진남루에 올라 하룻밤을 머무르셨다. ... 간간히 빈곳을 수축하니 성의
밑뿌리가 반은 무너졌다. 여장은 흔적이 없고 남문에 이르러서는 거의
거꾸로 넘어졌다. ... 신묘년(순조31,1831) 10월 유수 박기수는 기한다.
42 박현준·서승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