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오산문화총서 8집
P. 46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문지에 대한 기록은 없었지만 이광이
독성에 진을 쳤다는 기록이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키며 주둔하며 유격전을 전개하
였던 것을 볼 때 비록 방어시설의 상태는 좋지 않더라도 산성으로서 방어시설이 어느정도 이용
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에 농성전이 가능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문에 대한 가장 처음에 대한 언급은 서애선생문집에서 조발이 도망쳐 온 유염을 독성으로
들이지 않고 성문을 열지 않았던 것으로 볼 때, 성문이 존재했던 것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독산성은 여러 차례 수축이 이루어지는데, 북문지의 중복양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은
바로 현륭원의 조성이 되면서 외금양산이 되어 관리구역에 포함되면서, 산성 자체가 폐지될뻔
하였던 점이다. 그러나, 정조가 독산성이 사도세자가 방문한 유적지인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두
었으며 1792년 새롭게 수축하였다. 직접적으로 폐지된 기록이 없긴 하였으나 1789년에 양주군
배봉에 장사지낸 묘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는데, 3년간의 시기차로 볼 때, 어느정도는 산성의 관
리방침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바로 바라보이는 북문지 일대의 변화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원래 남문의 문루로 추정해오던 것은 ‘진남루’라 추정해왔다. 진남루는 선조32~36년 사이에
지어진 후, 1659년, 1753년, 1792년, 1831년 등 여러 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진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장헌세자가 머물러가기도 하고, 활을 쏘기도 하는 등 많은 방문이 이루어질 때 중요시되었
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진남루가 남문의 문루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검토한
6)
분석 연구가 제시되어, 남문지 일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도 여러 문헌
기록을 검토하였을 때, 1805년에 문지의 명칭이 비어있는 점, 수원군읍지에 남문은 진남문이라
는 점, 사람이 머무는 시설이라는 점, 관사의 정당이라는 점 등으로 볼 때 남문 일대에 위치했던
누각의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암문이 성위에는 장대 3칸이 있으니…’라는 수원군
읍지의 기록으로 볼 때, 장대로서의 역할 또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문의 경우 문루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현재 그 양상을 확인할 순 없다. 1872년지방지도과 수원군읍지
기록으로 볼 때 진남루가 아닌 진남문이라는 문루가 있었을 가능성은 제시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루는 남문과 서문에 존재하였으며, 앞서 살펴본 독산성의 현황으로 볼 때 개거식 혹
은 홍예식으로 잔존하고 있었던 남문과 서문에 문루가 존재하였으나, 조선 후기 이후 관리가 이
루어지지 않고 유실되고 현재의 모습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암문의 경우, 초기 독산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문이 4개로 기록되어 있다. 1831년 화성지의
6) 2017, 이용범, 「독산성 진남루 위치에 대한 재검토-문헌기록을 중심으로」, 『烏山學硏究Ⅲ』.
44 박현준·서승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