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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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내용 출처
민시가 아뢰기를, “원소를 완전히 봉안한 뒤에는 독성산성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성의 산 꼭대기가 혈
1789(정조13) 위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가까운 것 같지만 서로의 거리가 10리나 멀리 조선왕조실록
떨어져 있다. 밥짓는 연기나 닭, 개의 소리가 원래 묘에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나, 병기를 간직해 두는 따위도 이해를 논할 것이 없을 것 같다.”
독성산성을 수축하였다. 성의 주위는 1천 4보로 전체 성 중 신축 부분이
7백 32보, 수축한 부분이 2백 72보이다. 수문은 세곳을 개축하였고,
조선왕조실록
1792(정조16년) 성가퀴도 3백 9보를 신축하였으며, 남장대는 옛터에서 3척을 옮겨 다시
정조실록
세웠다. ... 장대는 바로 진남루로서 옛날 올라가 보았던 곳이다. 지금
수리를 하였다 하니 비문을 지어 내려야겠다.
.. 독성 서문 밖 양산의 여러 산록에 늘어서 있는 백성들의 무덤을 물자를
1804(순조4년) 보조해 주어 파서 옮기도록 하는 것, 독성 남쪽에 암문을 설치하는 것, 조선왕조실록
양산 동쪽 산록 및 독성 동문에 나무를 더 심는 것...
성첩은 석축으로 309첩이고, 둘리는 1010보(리로 계싼하면 5리)이며,
성문이 4개 있고, 남문은 진남문이라 하였다. 경진년(영조36,
1899 기록 1760)장헌세자께서 거둥하였다. 또 암문이 있고 성위에는 장대 3칸이 수원군읍지
있으니 정조 정미년(정조11, 1787)년에 세운 것이다. 정조 경술년(정조14,
1790)에 거둥했으며, 신해년(정조15,1760)년에 성첩과 성문을 중수하였다.
운주당의 앞쪽에 있다. 경술(정조14, 1790)년에 개건하였다. 편액은
1790(종조14) ‘독성아문’이라 하였다. 3칸이다. 단청을 칠했다. 행랑이 11칸이다. 화성지
(흡창방6칸, 사령방 4칸, 마랑 1칸, 공방 1칸이다)
석축이다. 309첩으로 둘레는 1010보이다〔리로 계산하면 5리이다〕.
성문이 4개 있다. 남문은 □□이다(옛날에는 이름이 없었다. 지금
임금님께서 신묘년(순조31, 1831)에 비로소 편액하였다. □□문도
같다). 경진년(영조36, 1760) 장헌세자께서 거둥하여 서문을 □□라
1831년 기록 하였다. 아울러 루가 있다. 동북문은 루와 이름이 없다. 또한 암문 1개가 화성지
있다(지금 임금님 을축(순조5, 1805)년에 세웠다). 성위에 장대 3칸이
있다(정조 정미년(정조11, 1787)에 세웠다). 정조 경술년(정조14, 1790)에
거둥하셨다. 금상이 신묘년(순조31, 1831)에 성첩과 성문 1개를 아울러
중수하였다(중수기가 있다. 「진남루」조에 나온다).
이처럼 독산성이 중요한 성곽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 권율이 독성으로 군사
를 진출시키고 방어하면서 유격전이 이루어진 이후 경기지역 남부를 방어하는 중요한 요새로
계속 언급하기 시작되었으며, 성곽에 대한 수리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현황에 대
한 구체적인 기록이 처음부터 남아있지 않고, 읍성과 같이 성 내부가 기록되어 있는 고지도나
회화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조선시대 이전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문지가 몇 개나 있었는지,
오산 독산성 문지 현황과 특징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