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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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오산지역은 선사시대 이래로 황구지천, 오산천 등 유량이 풍부한 하천과 더불어 광주산맥의
말단부에 해당하는 해발 100m 이상의 산맥을 중심으로 인류가 거주하였던 흔적이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삼미동·외삼미동이 위치한 신장동 일원의 필봉 산맥, 양산봉에
서 석산-여계산, 가감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서 청동기시대 집터가 중심을 이루는 마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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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다수 조사되었으며 금암동과 외삼미동에서는 고인돌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 명확하게 밝
힐 수는 없지만 오산지역은 청동기시대 어느 시점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고대 마한
의 한 집단으로 발전해 갔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백제의 영역에 편입되기 이전 오산에 존재
하였던 마한의 정치체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으나 세교지구 발굴조사에서 청동기시
대 이후의 도랑, 무덤이 조사되었고, 궐동에서는 마한 단계의 도랑을 두른 널무덤 36기가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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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점이 참고된다. 궐동 유적은 가장 이른 단계의 무덤이 2세기 중후엽으로 추정 되는데, 인근
수청동 유적에서 300여 기가 넘는 널무덤이 조사된 점으로 보아 오산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이후 고구려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기 전까지 오산지역 사람들은 세교지구 일원 능선에 묘역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마을은 필봉을 중심으로 한 내·외삼미동 일원과 남쪽 가감
이산 일대의 가수동, 청학동, 탑동, 두곡동 등에서 조사되었다.
553년 한강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서부지역 일대는 신라에 의해 점령되는데,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에 대비함과 동시에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행정적 성격의 산
성을 각지에 축조하였다. 오산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독산성은 이 당시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
는데, 최근 오산시와 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독산성 발굴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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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성벽을 확인 하였다. 이후 오산지역은 신주(新州), 한산주(漢山州) 등 한강유역 일대를
관할하는 주에 속한 지역으로 자리잡게 되며, 독산성과 양산동 유적에서 출토된 ‘水’자명 유물 4)
로 볼 때 신라 경덕왕 대 개칭된 수성군(水城郡)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까지 수성군의 치소로서 독산성과 양산동 유적 일대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정
1) 이형원, 2017, 「고고학으로 본 선사시대의 오산」 『오산학연구(Ⅲ)』, 오산향토문화연구소
2) 이혁희·이용범·신기철·황다운, 2020, 「오산 궐동유적 분묘군의 편넌」 『오산학연구(Ⅴ)』, 오산학연구소
3) 오산시·중부고고학연구소·한신대학교박물관, 2019, 『독산성과 세마대지 4차 정밀발굴조사 용역 약식보고서』
4) 畿甸文化財硏究院, 2001, 『오산 독산성·세마대지 시굴조사보고서』, 한신대학교박물관, 2009, 『烏山 陽山洞 新羅 遺蹟』
고려시대 오산의 유적과 유물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