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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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며 이후 어느 시점에 그 기능이 황구지천 북쪽의 수원고읍성 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읍성 하부 층위에서 대형의 건물 기초시설 및 고려시대 자기류, 그 아래의 통일신라 유물이
출토되는 층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소 이동의 계기나 새로운 읍치 조성의 경위 등
여러 역사적인 인과관계는 아직 불분명하므로 향후 밝혀야 할 과제이다.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
식 하에 현재까지 오산지역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유적과 유물을 살펴봄으로써 고려시대 오산지
역 역사의 일면을 탐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하였다.
Ⅱ. 고려시대의 오산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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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지역은 신라 경덕왕 대에 ‘수성군’으로 개칭 된 이후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후삼국으로
지칭되는 9세기 말경에는 궁예의 태봉국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정세
로 보아 중앙세력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고 수성군 내의 유력자(호족)가 반독립적인 지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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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받았던 형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이후 고려 태조가 남쪽 지역을 정벌할 때 고을 사람
인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백여 명이 귀순하여 협조하였으므로 그 공을 감안하여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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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수주(水州)라고 하였으며 그 시점은 중앙의 통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태조 23년(940
년)일 것으로 보고 있다.
김칠과 최승규는 당시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유력자였을 것이며, 수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로서 관련된 다수의 인물이 알려져 있다. 그 외에 200여 인은 별다른 설명이 없으므로 두 인물
과 관련된 사람들이거나 혹은 수원지역에서 일정 부분의 지역을 맡고 있던 중소규모의 유력자
들로 볼 수 있다.
성종 2년(983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당시 양주(楊州)가 목으로 승격되었고 수주를 관할하
5) 강정식, 2020, 「신라~통일신라의 오산」 『오산학연구(Ⅴ)』, 오산학연구소
6) 한신大學校博物館, 2000, 『水原 古邑城』
7) 『三國史記』 권35 잡지4 지리2
8) 홍영의, 2020, 「제4장 고려시대의 오산」 『烏山市史 제2권 역사/유적·유물』, 오산시사편찬위원회 이하 고려시대 역사
관련 내용은 해당 도서를 참고하였다.
9)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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