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7 - 오산문화총서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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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전반 경부터 19세기 경까지 제작된 지도를 살펴보면 현재의 오산지역은 수원부와 진

                위현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의 지명과는 다소 다르지만 초평·삼미(며)·중미 등의 명칭이 기
                록되어 있는 점을 볼 수 있으며, 독산성은 독성산, 독성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 존
                재했던 ‘청호역’은 충청주도(忠淸州道)소속 34개소의 역 중 하나로 동화(同和)·장족(長足)역과
                                       10)
                함께 수주(水州)에 속하였다 . 조선시대 전~중기 기록에 ‘역’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시기까
                지 존속하였다가 후기에 이르러 ‘주막’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위현은 현재 평택시 진

                위면과 서탄면에 걸쳐 있었는데,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고 수원부의 읍치가 신읍
                으로 이전하면서 일부 구역이 수원부로 병합되는 등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 고지도를 통해 보았을 때 고려시대 오산시의 대부분은 수원부 읍치 주변에 위치하였

                던 지역이었고 남동쪽 일부는 진위현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병지에는 양광도 소속 수주도에 보승(保勝) 175인, 정용(精勇) 291인, 일품(一品)
                             11)
                372인으로 기록 되어 있다. 보승과 정용은 중앙군에 번상하는 전투병으로 재지세력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일품군은 향리가 지방의 농민들로 구성된 공역병으로 이해된다. 전체 액수는 838
                                                                            12)
                인으로 이들이 실제 주둔하였거나 또는 혹은 수주도에 배정된 군액의 수 로 보고 있는데, 정확
                히 추산할 수는 없지만, 이들과 관련된 군호의 수를 고려하면 수주에는 상당수의 주민이 거주하

                고 있었던 셈이다.







                Ⅲ.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과 유물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오산시 관내의 유적은 총 19개소이다. 대부분 신도시, 도로, 공장, 근
                린생활시설 등 개발행위로 인해 실시된 구제발굴조사이며, 단일 성격 보다는 여러 시대의 유구
                가 중첩되거나 산포하는 형태의 복합적인 유적이다. 때문에 해당 유적을 지칭할 때는 현장에서

                조사된 모든 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생선뼈 무늬가 찍힌 기와, 청자 등 고려시대 유물이 출토





                10) 『高麗史』 권82 지36 병2
                11) 『高麗史』 권83 지37 병3
                12) 李相國, 2003, 「高麗時代 軍役差定과 軍人田」 『韓國中世史硏究』 제15집, 韓國中世史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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