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오산문화총서 8집
P. 59

1. 독산성



                 오산시 지곶동에 위치한 사적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의 조사는 1990년대부터 간헐적인 조
                사가 실시된 바 있는데 오산시는 독산성의 체계적인 정비·복원과 역사적 성격 규명을 위해

                2016년 본격적인 학술조사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삼국시대 처음 축조된 성벽과 유물,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임진왜란 및 그 이후 독산성의

                경영과 관련된 다수의 집터, 건물터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독산성의 활용
                과 관련된 자료는 매우 적은 편인데 이는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 어느 시점에 수성군의 치
                소가 화성 안녕동의 수원고읍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유물이 다량 포함

                되어 있는 문화층이나 고려시대로 편년되는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각종 시·발굴 등 굴토
                를 통한 조사에서 지속적으로 기와 및 도기, 자기 편이 출토되고 있고, 독산성 내부 전 지역에도
                산포하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독산성이 활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산성이라는

                유적의 특성상 기후 등 자연적인 현상이나 인간 거주 또는 수·개축 등 물리적인 영향으로 지속
                적인 삭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해당 시기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특정 시설로서 존재하였다고 추정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수원부의 군사시설, 즉 치

                소의 인근에 위치한 배후산성일 것이다. 또한 독산성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고대 석축성벽의 상
                부에서는 특정 패턴을 가진 축조방식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노출된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되었

                으므로 전체 구간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이와 같은 성벽이 잔존함으로써 고려시대에도 산성으로
                써 기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구와 유물, 층위, 맥락 등 여러 고고학적 정황과 맥락을 체
                계적으로 정리하여 입증할 필요가 있으나 현재까지의 양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 초

                에는 유사시 외침에 대응하기 위한 배후산성으로서 별다른 관리 없이 유지되었고, 외침이 발생
                한 후 수주의 사람들의 피난 및 방어를 위한 성벽을 급조하여 활용하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후 고려 말기에 양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 초 독산성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산성의 기능을 상실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구간은 13세기 대 대
                                                    13)
                몽항쟁 과정에서 입보(入保)산성으로서 조성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3) 金虎俊, 2012, 「高麗 對蒙抗爭期의 築城과 入保」, 忠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고려시대 오산의 유적과 유물  57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