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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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도착하여 진지 구축
❍ 1950년 7월 5일 – 새벽이 되자 폭우가 쏟아지고, 이후 폭우가 잦아지면서 짙은
안개가 끼어 시계가 좋지 않음. 동이 트기 전 야전식량으로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인민군의 출현을 기다림
❍ 1950년 7월 5일 오전 7시 – 차츰 시계가 좋아지며 수원을 점령하고 있던 인민
군이 8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인민군 제4사단 17, 18연대 병력 4,000명이 죽미
령을 향해 진격해오면서 전투가 시작됨. 인민군이 죽미령 보병 진지를 올라오는
순간 미군은 포(2.36인치 바추카포, 75mm 무반동총 등)를 발사하였으나 포탄을
맞은 인민군의 전차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옴. 그리고 인민군의 전차
대는 죽미령을 넘어 오산시내로 진입함. 이때 40여 분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20
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적의 전차는 파괴하지도 못함
❍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5분경 – 미군 포병은 보유무기 중 가장 화력이 쎈
105mm 곡사포의 대전차 포탄으로 탱크 2대를 파괴했으나, 가지고 있던 포탄 6
발을 전부 소모하자 속수무책으로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함
❍ 1950년 7월 5일 8시 15분 이후 – 차츰 근접전이 되었는데 9시경 인민군의 33
대의 전차가 나타나자 겁에 질린 병사들의 진지에서 이탈하는 가운데 피아군 간
의 전투는 더욱 치열해짐. 이날은 날씨도 좋지 않아 아군의 전투기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 1950년 7월 5일 9시 이후 – 미군의 포격을 피하기 위해 국도 양변으로 산개한
북한 인민군은 죽미령 동쪽의 뱀골(92m)능선으로 침입하여 미군들의 방어선을
측면에서 위협하기 시작하였음
❍ 1950년 7월 5일 오후 2시경 – 북한 인민군은 10배가량 되는 우세한 병력으로
삼면에서 공격해 왔고, 이에 스미스부대원들은 사투를 계속하였으나 시간이 흐
를수록 상황은 불리해져 한 시간 정도면 부대가 전멸할 상황이 되었음. 결국 스
미스부대의 퇴각이 불가피하게 되어 스미스 중령은 어쩔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으며(오후 2시 40분), 안성과 평택 간을 거쳐 천안에 집결토록 했음. 이날
한국군 17연대도 갈곶리에 진지를 구축하여 죽미령을 돌파한 북인민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전력의 열세로 후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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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산죽미령전투의 의의:
오산죽미령전투가 있음으로 해서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던 한국군의 패퇴
상황을 늦추어 낙동강방어선전투(낙동강전투)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어 낙동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밑거름이 된 중요한 전투가 된 것임.
스미스부대의 임무인 6·25전쟁의 남하 상태를 지연시키는 것이 임무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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