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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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싸우기도 전에 피해를 입는다.
국군 제17연대의 배치는 육군본부 및 제1군단 명령에 따른 것인데, 평택 서정리에
서 8km를 북상하여 오산 남쪽 1.5km지점인 갈곶리 일대의 구릉지대에 병력을 배
치했다. 1950년 7월 4일 새벽 육군본부는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국군 주력이 철수
하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제17연대를 새로 창설되는 제1군단에 배속시킴과 동시
에 작전 명령을 하달한다.
제17연대가 7월 4일 오전 5시쯤 이동을 개시하여 오산에 진지를 구축한 이날 오
후 스미스 중령 일행이 제17연대 지휘소로 와 연대장 직무대리인 김희준 중령에게
오산의 북쪽 죽미령에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병력을 배치할 것을 제의하였지만 병
사들의 피로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와같이 한미 양국 부대가 남침하는 북한 인민군
을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인접 지역에 배치되었으나 초기에 지휘 통일의 결여로 각
자 작전을 수행하여 북한 인민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한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1950년 7월 5일 오전 9시 북한 전차대가 죽미령에 포진한 스미스부대 진지를 통
과해 오산으로 남진을 계속해 제17연대 제1중대 진지 부근을 통과했다. 적 전차대
가 나타나자 제1중대는 기관총과 2.36인치 로켓으로 공격했으나 꿈적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공격을 당해 제1소대장 이규환 중위가 중상을 입고, 제2소대장
박만업 중위도 총상을 입었다. 이에 아군들은 연대 본부가 있는 갈곶리로 철수하였
다.
1950년 7월 5일 오전 11시쯤 북한군 전차대가 주진지인 갈곶리에 나타나자 연대
는 즉각 81mm 박격포로 공격했지만 포격에 놀란 선두 전차 4대가 갈곶교에 이르
러 기관총을 난사해왔다. 이에 전차공격 소대장으로 임명된 윤종환 중위는 각 중대
에서 차출된 2.36인치 6문을 2문 1개 조로 편성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적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능선 너머로 몸을 숨겼으나 곧 이어 적 전차서 발포한 포탄이
작렬하고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제9중대 지역에 있던 제3대대 중화기 중대장 정규
환 대위는 2.36인치 로켓이 적 전차를 파괴시키지 못하자 제3대대 부대대장 강은덕
대위와 함께 적 전차에 접근하여 수류탄을 명중시켰으나 허사였다. 적의 선두전차
는 아군을 공격하면서 평택 서정리를 향해 남하하였다.
오후 5시쯤에는 적의 보병부대가 전차 3대를 선두로 차량에 탑승한 채 아군의 연
대 진지로 접근하고 있었다. 적들이 1km까지 접근하자 박격포와 기관총이 불을 뿜
었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북한 인민군은 도로 가까이 있는 66고지를 공격하였다.
적의 주공격을 받았던 제9중대는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제1소대 오윤근 중위 지휘하의 33명의 소대원이 완강히 저항하
였으나 소대장이 전사하자 분산 철수하고, 3개 소대를 일선에 배치한 제3중대도 치
열한 사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을 당할 수 없었다. 연대장 직
무대리인 김희준 중령은 1번 도로 부근에 배치된 2개 중대가 분산 철수하게 되자
퇴각을 결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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