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0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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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시계가 좋아지며 수원까지 보이던 시각은 스미스부대가 북한 인민군과 첫 조
우한 1950년 7월 5일 오전 7시경이었다. 8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 인민군의 제4
사단 16·18연대 4,000여 명이 수원 쪽에서 스미스부대가 포진하고 있는 죽미령을
향해 진격해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5일 오전 8시 16분 오산 죽미령에서 초탄을 발사하는 미 제52 야포대대
북한 인민군이 죽미령을 올라오는 순간 아군의 포병이 발사한 포탄이 작렬하였다.
그러나 적의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전차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전진해 왔
다. 북한 인민군의 전차대는 아군의 다양한 공격에도 유유히 보병진지를 통과해 죽
미령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때 40여 분간의 전투에서 20여 명의 피해를 보면서도
적의 전차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미군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병진지를 통과한 북한 인민군의 전차들이 죽미령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미군
은 오전 8시 15분경 보유무기 중 가장 화력이 강한 105mm 곡사포의 대전차 포탄
으로 북한 인민군의 대전차(탱크T-34) 2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보유하고 있던 대전
차포탄 6발을 전부 소모하자 나머지 전차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105mm 포대의 포병 사격으로 북한 인민군을 공격하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
한 것이었다. 무기의 부족으로 중과부적이 된 것이다.
죽미령전투는 차츰 근접전으로 화하기 시작하였는데, 22발의 바주카포탄을 얻어맞
은 북한 인민군 전차는 끄떡도 하지 않고 기동해왔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경기관
총으로 응사하며 용전분투하다가 북한 인민군 전차병의 다발총탄에 맞아 전사한 켄
넌트 샤드릭 일등병은 미군 보병의 첫 전사자로 기록되고 있다. 75mm 무반동총
그리고 2.36인치 바주카포도 북한 인민군의 전차 대열을 완전히 저지시키기에는 역
부족이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페리 중령이 부상했으나 후송을 거절하고 전투를 진
두지휘했다. 10분 후에 1개 반의 북한군 전차대가 고개를 내려오자 병사들은 공포
에 사로잡혀 진지를 이탈하여 도망쳤다. 그러나 장교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신들이
포수가 되어 적의 전차 1대를 파괴하였다. 이것을 본 사병들도 자기 위치로 돌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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