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7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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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니  한·미  연합작전의  서막은  열리다.  혈전  6시간  15분  피바다  이루고  화

                  선은  낙동강으로  이어지니,  한  품은  고혼  이곳에  잠드니  혈맹의  우의  어찌  잊으랴.”


                    이  전투에서  150여  명의  유엔군  소속  미군이  전사하고  장교  5명,  사병  26명이  실
                  종되는  피해를  보았다.  오산지역은  1950년  7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2개월  18일
                  동안  북한  공산당에  의한  지배를  받았고,  9월  24일  퇴각하였다.

                    매년  7월  5일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는  기념식이  오산시  주관으로  거행되고  있다.
                  기념비  건립일은  1982년  4월  6일이다.
                    민간인의  희생도  많다.  별도로  현재  이분들을  위해  위령제를  수청동  현충탑에서
                  매년  10월  말경  오산시에서  주관하여  올리는데  진행은  사회단체에서  맡아서  한다.


























                                                                                오산  죽미령  유엔군초전비  전경



                  3.  오산죽미령전투  상황





                    잠시  6·25전쟁  당시  죽미령전투  상황을  알아보도록  한다.


                    수원과  평택사이에  있는  경부국도선상의  오산지역은  유엔군의  주축을  이룬  미  지
                  상군의  선견부대가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곳이다.
                    1950년  6월  28일  유엔의  신속한  한국지원결정에  따라  일본  도쿄(동경)의  미  극동

                  군  총사령부가  워싱턴으로부터  미  지상군  투입에  대한  법적  승인을  받은  것은
                  1950년  6월  30일이다.
                    한국  전선에  투입하게  된  주일  미  지상군은  제7사단,  제1기병사단,  제25사단,  제
                  24사단  등이었는데,  그중  선견부대(제24사단  제2연대  1대대)를  부산으로  공수하고,
                  나머지  주력부대는  해상  기동으로  파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  7월  1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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