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오산시역사문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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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는  인민군  전차대와  수원-오산  간  국도  및  철로  변  지대에서  전투하였고,

                  1950년  9월  28일까지  인민군의  모든  진지를  탈환하였다.

                    서울  수복  후  3개월  10일  만에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7일  오산
                  을  다시  포기하게  된다.  그러나  유엔군은  1951년  1월  15일  오산지역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1951년  1월  16일  오산을  재탈환하게  된다.


                    6·25전쟁은  전  국토가  전쟁터이었으나  최초의  전투가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시
                  작된  곳이  오산이므로  오산  죽미령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3년  1개월
                  간의  전쟁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전쟁이었다.  남북한에서  150
                  만의  사망자와  360만의  부상자가  생겼으며  온  국토가  파괴되어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민족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고  남북한  대립이  고착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  김일성은  민족의  씻을  수  없는  반민족적  행위자인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
                  전이  성립될  때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군
                  이  한국전쟁  최초의  전투를  담당하였고,  인명피해를  입은  죽미령전투의  역사적  의

                  미를  함께  나눈다는  혈맹의  동맹군으로  공동방위의  필요성을  공감한  때문이다.  북
                  한군도  오산  죽미령전투에서  제4사단  문화담당  부사단장을  포함하여  전사자  42명,
                  부상  85명의  인명피해를  냈으며  전차  4대를  잃었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오산지역에서의  전투양상에서  분명히  나타

                  난다.  국군,  북한  인민군,  유엔군(미군),  중공군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싸웠고  소련
                  은  북한  인민군을  지원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산지역은  1950년  7월  5일부터  9월  22일까지  2개월  18일
                  동안  공산당에  의한  인민위원회를  경험했다.  마을인민위원회는  인민위원장,  여맹위

                  원장,  서기장,  자위대장  등이  선출되었는데  새로  선출된  인물은  다른  지역에서  온
                  좌익계  사람들이었다.  당시  오산리에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있었고  주민의  권유로
                  총대를  멘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혈연집단과  씨족  구성이  강한  이곳에서는  마을
                  청년들을  도피시켜  의용군  모집에  응한  숫자는  적었다.  토착  좌익활동가들이  농민
                  위원회나  민청위원장을  맡기는  하였으나,  의용군  지원을  권유하였을  뿐  강제적으로
                  징집하지는  못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주도하에  토지개혁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이루

                  어졌는지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처음에는  환영을  받았으나  인민군은  수확고를
                  확인하여  현물세를  받았음이  확인된다.  모든  수확  작물  잡곡  심지어는  과실까지도
                  25%를  부과하는  현물세는  일제시대  미곡만을  공출당했던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
                  었다.  그러나  빈농층은  잠시  동안이라도  혜택을  입을  수도  있었으나  자작농으로  바

                  뀔  수는  없었다.  오산은  권율의  독산성전투,  6·25의  오산(죽미령·갈곶리)전투에서
                  보듯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며  앞으로도  이  역할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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