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오산학 연구 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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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처럼 속여 왜적을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는 내용을 근거삼아 세마행위는 아니더라도 독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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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권율이 쌀로 적을 속이는 전술을 사용했다는 견해가 있다 .
                앞서 검토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독산성전투 당시에는 장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세마일화에
               서도 장소를 장대로 특정 짓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마일화 자체도 독산성에서 권율

               이 쌀로 적을 속이는 전술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들이 후대로 전해지면서 재창조되거
               나 새롭게 창조되어 지역에서는 널리 퍼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장대의 건립과 독산성전투

               사이의 시간차이는 정조 11년(1787) 독산성 정상에 장대가 새롭게 건립될 때 지역에 퍼져있던
               세마일화가 접목되게 되고 정식명칭은 아니지만 세마대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것이 화성지에 기
               록되게 되면서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



               2. 일제강점기



                                10)
                일제강점기의 기록 은 세마대의 기원과 수리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 기록들은 1914년 독산
                                      11)
               성 내 주민들에 대한 疏開令  이후의 기록들로 세마대의 중건기를 보면 …(전략)…한일합병 후
               왜인은 세마대를 파괴하고 주거민은 각처로 분산되어 …(후략)… 라고 되어있어 세마대가 한일

               합병 후 파괴었다고 보는 견해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고적조사 기록이 모두 주민소개령 이후이
               며, 『경기도 고적대장』의 기록이 주목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고적대장』
                …(전략)…세마대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으며 약 70년 전에 수리되었다.…(후략)…



                이 기록을 보면 세마대가 한국강제병합 이후에도 잔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적조

               사 보다 앞서 제작된 1912년 지적원도를 보더라도 독산성 내에 지목이 대지로 구분되는 곳이 표
               기되어 있어 세마대가 한일합방 후 파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다만, 일제강점기





               9) 심승구, 2020, 「임진왜란 독산성 전투의 관방사적 의미」, 『2020 오산 독산성 학술심포지엄』, 2020 백산학회 추계학술대회 자
                료집, p194.
               10) 殖産國 山林科(추정), 1916~1917, 『경기도 고적대장』.
                 고적조사위원회, 1919, 『유적 및 유물 소재 보고』.
                 생산연도 및 생산부서 미상, 『조선 유적유물 연구』,
               11) 오산시사편찬위원회, 2009, 『오산시사』, 오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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