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3 - 오산학 연구 6집
P. 63
7)
우에 해당한다 . 또한 조선시대 독산성의 보수기록을 보면 대대적인 보수 뿐만 아니라 지속적
인 보수가 진행되지만 내부 건축물로 장대가 등장하는 것 화성지가 처음이다. 따라서 화성지에
세마대로 불리우는 장대는 기존 건물을 개건하거나 중수 한 것이 아닌 정조 11년(1787)에 새롭
게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시간적 차이에 대해서는 독산성전투 당시 독산성 내에 세마행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검토와 함께 세마일화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독산
성전투는 1592년으로 독산성의 첫 보수시점인 1594년보다 이르며 독산성이 임진왜란 이전에는
성으로 이용되지 않던 古城이었던 것을 볼 때 독산성전투 당시에는 구조적으로 성의 모습을 갖
추고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594년의 보수도 4일만에 긴급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독산성이 성의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602년의 대대적인 보수 이후이다. 따라서 독산성
전투가 이루어졌을 당시에 지휘소의 역할을 했던 곳은 존재 하였겠지만 건축물로 장대는 존재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또한 세마일화를 보더라도 세마행위를 했던 장소를 장
대로 특정 짓고 있지는 않다.
다음으로 세마대와 세마일화는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음에도 그 명칭과 일화가 처음으로 확인
되는 것은 임진왜란으로부터 약 200년 뒤이며, 그 이후에도 수원군읍지, 운양집에서만 확인되
는 것이다. 이에 반해 권율의 독산성전투는 조선왕조실록, 난중잡록, 간이집, 만기요람, 임하필
기, 국조보감 등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도 세마일화와는 차이가 있다. 심지어
8)
영조가 독산성에 방문하여 임진왜란에 대해 떠올릴 때 도 세마대 또는 세마일화와 관련한 내용
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문헌기록의 양상을 볼 때 독산성전투가 후대에 전해지면서 세마일
화가 영웅담과 같이 덧붙여져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송응창이 본국에 자문을 올려 표
창하는 내용 중에 권율이 꾀를 내어 왜군을 막아냈는데, 근래에는 다시 모래를 자루에 담아 식
7) 독산성 내의 암문의 경우 화성지의 기록을 보면 순조 4년(1804)에 새롭게 축조한 것으로 암문의 기록을 보면 …(전략)…暗門一
當宁乙丑建…(후략)…으로 되어 있다. 새롭게 축조된 암문의 경우도 改建, 重修가 아닌 建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建으로
표기되어 있는 장대는 기존의 건물을 개보수 한 것이 아닌 새롭게 축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8) 『朝鮮王朝實錄』英祖實錄
영조26년 9월 26일
독성 산성에 올라 임진 왜란 때의 일을 상고하다. 임금이 수원을 지나면서 독성 산성에 올라 해문을 바라보면서 승지 황경원을
돌아보며 말하기를…(중략)…임금이 탄식하기를, “수길의 난리에 도독 진린이 광서·광동의 수군을 거느리고 행장과 노량에
서 싸워 크게 격파해 행장이 도망하였다. 남한 산성이 포위당하자 총병관 김일관이 산동 제진의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
려 했는데, 군사가 이르기 전에 성이 이미 함락되어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내가 어찌 차마 황제의 은혜를 잊겠는가?”…(후
략)…
세마대 건립 및 변천과정 연구 61